[노트북을 열며] 밸류업 기업의 배신
“한국 주식을 살 사람이 없다.” 한국 주식의 부진 이유에 대해 한 자산운용사 대표가 꺼낸 말이다. 외국인들은 한국 시장에서 돈을 빼기 바쁘고, 기관 역시 하락하는 한국 주식을 쉽게 담지 못한다. 개인들의 저가 매수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 매수세가 예전만 못한 것은 미국 증시, 암호화폐 등 한국 증시를 떠나 눈을 돌릴 곳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 증시가 반등하면 다시 돌아올 투자자들도 많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투자자들 사이에서 한국 주식에 대한 불신과 기피가 하나의 투자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불신의 근거도 간단히 넘길 수 없다. 반도체 기판 회사인 이수페타시스가 지난 8일 장 마감 후 오후 6시44분에 낸 ‘올빼미 공시’를 살펴보자. 이 회사는 기존 주식 수의 32%, 5498억 원에 달하는 유상증자를 공시했다. 8일 종가 기준 시가총액(2조80억원)의 27.3%에 해당하는 액수다. 이 회사 주가는 11일 22.68%(7200원) 급락한 2만4550원에 거래를 마쳤다.
주식 시장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자본시장의 당연한 역할이다. 문제는 소통 방식과 사용처다. 이 회사는 당일 오전 9시에 이사회를 열어 유상증자를 결정했는데, 정작 공시는 장 마감 후 진행됐다. 대규모 증자를 하면서도 주주와의 소통은 거의 없었다. 사용처에도 의문이 남는다. 이수페타시스는 유상증자 자금 중 2998억원을 2차전지 소재기업 제이오 인수에 사용할 계획이다. 회사 측은 “포트폴리오 다각화”라고 설명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드물다. 반도체 기판 회사가 2차전지 소재업에 진출하는 것이 인수 시너지를 낼지 의문이라서다. 게다가 이수그룹은 이미 2차전지 소재업을 하는 이수스페셜티케미컬이라는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다. 증권가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결정”(메리츠증권)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수페타시스는 밸류업 우수기업으로 선정되어 ‘밸류업 지수’에 포함된 회사다. 대규모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했다가 철회한 고려아연 역시 밸류업 지수에 포함된 기업이다. 밸류업을 잘한다고 선별된 기업마저 이런데, 다른 기업은 말할 필요가 없다. 주가가 오르면 유상증자 폭탄을 걱정해야 하고, 신사업이 잘 되면 LG에너지솔루션과 같은 물적 분할과 쪼개기 상장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한국 투자자의 현실이다. 이젠 한국 증시에 투자하라는 말도 민망할 지경이 됐다. 한국 주식시장을 이대로 둘 생각이라면, 차라리 미국 주식 투자에 대한 세금이라도 줄여주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국민의 자산 형성에 더 도움 될 듯하다.
안효성 증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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