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성 팬에 납치도 당했지”…‘원조 정년이’의 그때 그시절
“김태리가 누군지도 몰랐어. ‘정년이’라는 드라마 만든다고 배우 여럿이 와서 소리 배워갔지. ‘방자전’을 연습해서 보여주는데 영 좀…. 남자라면 이렇게 걸어야 한다고 (어깨를 쫙 펴며) 시범 보였지.”
한 옥타브 낮은 저음에 툭툭 끊기는 말투, 짧은 머리와 단호한 눈빛. tvN 인기드라마 ‘정년이’의 주인공 정년이(김태리)가 60년 뒤 이런 모습일까. 한 시대를 풍미한 여성국극의 남역(男役) 원조스타이자 서울시 무형유산 판소리 보유자 이옥천(78) 명창이다.
그가 이제껏 국극에서 소화한 100여 가지 역할 대부분이 남역(이몽룡, 방자, 사도세자, 윤동주 등)이다. 국악계에서 가장 여성팬이 많다. 1950년대 여성국극 전성기를 그리는 ‘정년이’는 제작 단계에서 여러 배우들에게 자문했는데 특히 남역과 관련해선 이 명창의 연기·스타일을 참고했다고 한다.
지난 5일 이 명창의 판소리 전수소인 ‘옥당 국악실’(서울 약수동)에서 그를 만났다. 옥당은 그의 호다. 4면 벽을 메운 포스터·사진·상패가 화려했던 60년 경력을 말해주는 듯했다. 160㎝가 채 안 되는 키에 남자 주인공이라니 싶은데 사진 촬영을 위해 갓을 쓰는 모습부터 카리스마가 뿜어 나왔다.
“어떻게 하면 남자로 보일까 수도 없이 연구했지. 무엇보다 소리가 중요한데, 나는 배울 때부터 목청이 (남자에) 잘 맞더라고. 다들 여자 주인공만 하려고 하니 나름 차별화도 됐고.”
그는 아홉 살 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 전설의 소리꾼 박록주(1905-1979) 명창에게서 동편제(호남 동부에서 전승된 판소리 유파)를 사사했다. 서라벌예대(훗날 중앙대로 합병) 재학 당시에도 촉망받는 소리꾼이었지만 어릴 때 봤던 여성국극의 화려함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귀랑이라는 예명을 짓고 1969년 국극단 ‘이귀랑과 그 일행’을 조직해 전국 순회공연을 했다. 남역을 도맡아 한 그의 인기가 얼마나 거셌던지 공연 마치고 나온 길거리에서 그의 팔을 붙잡고 납치하다시피 끌고 간 극성 여성팬이 있었을 정도다.
“제발 놔 달라. 남은 공연은 해야 하지 않냐 하고 설득해서 겨우 그 집에서 빠져나왔지. 말도 마. 그땐 결혼식 느낌 내달라면서 사진관에서 신랑·신부 포즈 부탁한 팬도 있었으니까.”
2년 여 전국을 돌며 인기를 누렸지만 남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기획사에 농락당해 고향(경북 경주)의 집과 전답을 날렸다. 다른 대중문화 볼거리가 늘어나자 여성국극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그에게 인간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타이틀을 물려주고 싶어 한 스승(박록주)이 별세한 뒤 이 명창은 중앙대·국악예고 등에서 강사로 일했다. 여성국극은 그렇게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다.
“1993년에 국극 부흥 차원에서 국악계가 합동으로 ‘춘향전’을 공연했어. 남역 할 사람이 없다고 나더러 방자를 해 달래. 좀 까불까불 재미있게 했더니 그게 이몽룡보다 (인기가) 터져서…. 그때 팬클럽 분들이 여태 중요한 공연할 때마다 지원해주시고, 고맙지.”
이후 ‘안평대군’ ‘윤동주 일대기’ ‘황진이’ ‘자유부인’ 등 다채로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을 도맡았다. 본업인 판소리 공연도 활발히 하면서 44세에 박록주 바디 ‘흥보가’, 45세에 박록주 바디 ‘춘향가’, 56세에 박봉술 바디 ‘적벽가’를 완창했다. 바디란 판소리에서 전승해 내려오는 특정 유형을 이른다. 2004년 서울시 무형유산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로 인정됐다.
자신의 전수소를 통해 이계순·남경호 등 여러 제자를 키워냈고 2009년엔 사단법인 옥당국악국극보존회를 출범시켰다. 1년에 1~2회 국극 공연을 만들지만 예전 같은 규모나 대중화는 기대하기 힘들다.
이날 인터뷰에 함께 한 노재명 국악음반박물관장은 이 명창을 가리켜 “남성적이고 호방한 음색이라 여성에겐 쉽지 않은 동편제 판소리를 제대로 구사하는 분”이라고 설명했다. 이 명창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 『판소리 명창 이옥천』을 펴낸 노 관장은 “K팝, K드라마, 한식 붐에 이어 한국에 판소리 유학 오는 외국인도 상당하다”면서 “드라마 ‘정년이’로 인해 ‘국악=낙후된 것’이란 우리 고정관념이 깨진 걸 긍정적으로 본다”고 했다.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국가유산진흥원이 오는 12월3일 무대에 올리는 여성국극 ‘선화공주’ 때 이 명창은 막간 특별극에 잠깐 출연할 예정이다.
미혼인 이 명창은 “나는 장가를 두 번 갔다”고 했다. “판소리가 본처고 두 번째는 애첩인 여성국극”(웃음)이라면서다.
그는 “재정 지원이 부족해 국극 후진 양성이 힘들다”는 점을 가장 아쉬워했다.
“여성국극이 좀 더 발전하면 일본의 여성극단 ‘다카라즈카’보다 나을텐데, 재주 있는 사람들이 오지도 않고 와서도 버티기 힘들고.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진 하려고.”
그러면서 딱 부러지게 덧붙였다.
“내가 잘 하는 건 없지만, 예술은 자신 있어.”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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