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높은 독재자, 분신으로 저항했던 동유럽 청년들

이준목 2024. 11. 1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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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이준목 기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 현 러시아)은 20세기 2차세계대전과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동유럽을 장악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수많은 악행들을 저질렀다. 동유럽의 국가들은 나치 독일에서 소련에 이르기까지 강대국들의 연이은 압제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고 민주화의 열망을 이루기 위하여 오랫동안 길고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했다.

소련은 왜 동유럽의 자유를 짓밟아야만 했을까. 동유럽은 거대한 소련에 맞서서 어떻게 자유를 되찾았을까. 11월 12일 방송된 tvN<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동유럽의 자유를 소련은 어떻게 짓밟았나' 편을 통하여 동유럽의 민주화 투쟁 역사를 조명했다. 김철민 한국외대 동유럽학대학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동유럽의 민주화 투쟁 역사
 tvN<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 tvN
제 2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세계사와 동유럽의 판도에 큰 영향을 미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전쟁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기습 침공에서 비롯됐다. 폴란드는 독일에게 점령당하여 전 국토가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며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야 했다.

약 6년에 걸친 전쟁 끝에 2차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의 자유는 돌아오지 않았다. 1945년 2월 열린 미국-영국-소련의 지도자들이 모여 독일의 패전과 전후 정세를 논의한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소련군이 점령한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한다.

미국은 동유럽 국가들이 스스로 정치적 결정권을 가지고 민주적인 정부 수립을 도와야한다는 조건을 달고 스탈린의 요구를 수용한다. 하지만 스탈린은 겉으로는 약속을 지키는 척 했지만, 실제로는 동유럽을 공산화시키기 위하여 반대세력을 조금씩 무력화하는 살라미 전술을 통하여 친소 정권들을 수립한다.

스탈린은 2차대전 종전 2년 만에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에서 모두 공산당을 집권당으로 키워냈다. 형식상 나라 이름만 유지되었을뿐 실제로는 모두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한 셈이었다. 이때부터 소련의 영향력에 있는 국가들을 가리켜 동유럽이라는 구분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얄타 회담 두달만에 뇌출혈로 사망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생전에 "스탈린과의 타협은 큰 오판이었다"며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이 1946년 한 연설에서 소련에 의한 공산주의 확산을 경계하며 나온 어록이 그 유명한 '철의 장막(Iron curtain)' 표현이다. 처칠은 동유럽의 공산화로 인하여 철의 장막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간 정치적 이념의 경계선이 되었다고 평가했으며, 이는 훗날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공산주의 확산에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은 1947년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을 연이어 발표하며 유럽내 자유진영 국가들에게 대규모 군사-경제적 원조를 제공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으로서는 유럽에 막대한 경제지원을 감수하면서도 일단 자유진영의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 당시 미국이 유럽 국가들에 원조한 규모는 약 130억달러(한화 17조 5천억)에 이른다. 또한 서방 자유진영에서는 군사협력체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를 설립하며 소련에 대한 공동 대응을 강화한다.

일부 동유럽 국가들도 마셜 플랜에 관심을 보였지만 소련의 강력한 압박으로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스탈린은 "동유럽은 동맹국이 아니라 통제 대상일 뿐"이라며 노골적으로 동유럽 국가들의 주권을 무시하는 본색을 드러냈다.

소련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간 동유럽에는 연이어 악명높은 독재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대머리 살인자'라는 닉네임으로 불린 헝가리의 라코시 마차시를 비롯하여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비에르투, 체코슬로바키아의 클레멘트 고트발트, 불가리아의 벌코 체르벤코프 등은 모두 스탈린을 본받아 잔혹한 공포정치로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탄압하며 '스탈린의 개'라는 악명을 떨친 인물들이다. 또한 소련은 자국의 비밀경찰국인 NKVD(엔케베데)를 모방한 조직을 동유럽 국가 곳곳에 설립하여 정보수집과 반대세력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동유럽의 독재자들은 공산주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사상교육을 추진했다. 동유럽 공산국가들에서는 소련화를 위하여 러시아어가 필수교육과목으로 지정됐고 자국어를 쓰는 시민들은 처벌을 받았다. 또한 서방 자유진영의 대중음악은 공산주의 체제를 약화시킬 수 있는 이유로 철저히 금지되었다.

동유럽은 경제분야에서도 소련을 본 따 스탈린식 경제체제를 도입했다. 토지 국유화 정책으로 강제로 땅을 빼앗긴 동유럽인들은 농장에서 얻은 수확물을 갖지 못하고 국가가 주는 배급에 의존해야 했다. 집단농장화로 인한 생산량 감소와 수탈 등으로 인하여 동유럽 국가들의 경제 체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소련은 동유럽에서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한 여론이 점점 악화되어가자, 1949년 소련판 마셜플랜으로 꼽히는 공산국가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을 설립하여 대응에 나서는듯 했다. 하지만 정작 소련은 코메콘을 통하여 동유럽의 주요 자원을 저렴한 값에 소련에 팔도록 조치하고, 자국의 자원은 코메콘에 가입한 국가들에게 더 비싸게 판매하는 방식으로 또 한번 동유럽의 뒤통수를 치게 된다.

1953년 3월 5일, 동유럽의 공산화를 주도한 최대 흑막이던 스탈린이 뇌출혈로 사망한다. 그 뒤를 이어 소련의 최고 지도자가 된 흐루쇼프는 2년 뒤인 1955년 나토에 대응하기 위한 공산국가 8개국의 군사 동맹인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설립한다. 이는 동맹이라는 명분 하에 동유럽 국가내에 반공산주의 세력의 반란이 일어나거나, 서방 국가의 공격시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흐루쇼프는자신의 정치접 입지 강화를 위하여 '탈 스탈린 정책'으로 차별화에 나선다. 흐루쇼프는 1956년 공산당 연설에서 놀랍게도 스탈린을 '천하의 악당이며 용서할수 없는 독재자'로 규정하며 사후에도 여전히 소련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스탈린 지우기에 나섰다.

또한 흐루쇼프는 동유럽 국가들에도 그동안 스탈린식의 권위주의와 공포정치 노선에서 탈피하면서 보다 협력적인 자세를 취하는 듯 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동유럽 사회 전반에 자유와 개방을 원하는 나비효과로 되돌아왔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독재과 경제 침체로 오랫동안 불만이 쌓여왔던 동유럽에서는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56년 헝가리에서 동유럽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부다페스트의 봄'이 시작된다. 공산주의 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정책을 주도하던 너지 임레 총리가 소련의 외압으로 밀려나고, 독재자 마차시가 총리로 복귀한 사건을 계기로 헝가리인들의 분노가 폭발한다. 무려 20만 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도심에 집결하며 스탈린의 동상을 끌어내리고 국기에서 소련의 상징을 불태우는 등 격렬하게 반발한다.

이에 크게 놀란 소련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다시 너지 임레를 총리로 복귀시켰다. 하지만 돌아온 너지 임레는 공산당 일당독재 폐지, 소련군의 헝가리 철수, 코메콘과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등 더욱 강경해진 개혁 정책으로 소련과 대립각을 세웠다.

소련은 결국 헝가리에 대한 무력진압을 결정한다. 소련군은 철수 약속을 깨고 부다페스트를 침공했고 시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약 3천여 명의 헝가리 시민이 소련군에 살해당했고, 약 20만 명이 해외로 도피했다. 헝가리 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현재 헝가리는 매년 10월 23일을 국경일을 정하고 민주화를 위하여 싸웠던 이들을 추모하고 있다.

흐루쇼프는 헝가리의 민주화를 무력으로 일단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후 쿠바 미실 이위기 등, 외교와 경제에서 연이은 실정으로 궁지에 몰리면서 실각한다.

뒤이어 1964년 집권한 브레즈네프는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직접 지배를 통한 정치적-군사적 통제를 더욱 강화한다. 이어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이름을 딴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발표하며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위협이나 자본주의로 돌리려는 어떤 시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을 표방한다. 이는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국들이 동맹국의 내정에 언제든 깊이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프라하의 봄'
 tvN<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 tvN
 tvN<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 tvN
1968년에는 '프라하의 봄' 사건이 일어난다. 소련군은 이번엔 민주화와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체코슬코바키아를 침공한다.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무기를 들고 무력 저항 대신 꽃을 들고 맨몸으로 전차와 총구앞을 막아서며 평화로운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소련군은 비무장인 시민들에게 잔인한 무력 진압을 강행하여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 또한 개혁운동을 추진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 둡체크를 생포하여 강제로 정계에서 은퇴시켰다.

하지만 거듭된 탄압에도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를 위한 열망은 꺾이지 않았다. 1969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평범한 대학생이던 얀 팔라흐는 프라하의 봄을 좌절시킨 소련에 저항하고 민주화의 불씨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분신을 시도한 사건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팔라흐를 시작으로 동유럽 곳곳에서는 젊은이들의 분신을 통하여 소련의 압제에 항거하는 저항운동이 확산된다. 당시 분신자살사건을 보도하며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 머리를 들고 죽는 것이 낫다"는 체코슬로바키아 언론의 표현은 당시 동유럽인들의 절절한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

동유럽인들의 끈질긴 저항은 1980-90년대 소련의 쇠퇴로 맞물려 마침내 결실을 맺게된다. 1985년 소련 최고지도자가 된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포기할 것을 선언한다. 이로서 동유럽인들의 민주화 열망은 더욱 거세진다.

1980년대 폴란드의 자유선거를 시작으로 마침내 동유럽에 그토록 기다려온 민주화의 물결이 불어오게 된다. 이어 헝가리에서도 공산주의 정권이 해체되었고, 1989년에는 베를린 장벽 해체와 동독 공산주의 정권의 붕괴로 독일 통일이 이뤄진다. 같은해 12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벨벳혁명'이 일어나 공산 정권이 해체하면서 동유럽 주요 국가들은 모두 꿈에 그리던 민주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는 수여될 수 없으며 쟁취해야 한다' 루스벨트의 어록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얻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지, 그래서 더 큰 가치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자유라는 기본 권리를 되찾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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