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와 멜라니아, 무엇이 다를까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손녀 카이 트럼프가 지난 7일 자신의 X에 올린 가족 사진. 일론 머스크가 함께 하고 있다. |
ⓒ 카이 트럼프 X |
제1기 트럼프 행정부 때는 부인 멜라니아 트럼프와 더불어 백악관 고문인 딸 이방카 트럼프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가 주목을 받았다. 이번 대선 직후에는 장남인 트럼프 주니어가 백악관에 들어가리라는 전망이 나오다가 지난 11일 그가 벤처캐피털 회사를 선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금 한국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로 인해 정권이 흔들거리고 있다. 그래서 부인뿐 아니라 일가족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국정에도 개입하는 트럼프 쪽 상황이 한국인들의 눈에 심상치 않게 비칠 수도 있다.
▲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2023년 10월 17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34회 프레미엄 임페리얼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
ⓒ EPA=연합뉴스 |
취임 닷새 뒤인 1993년 1월 25일 빌 클린턴은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6개 부처 장관과 백악관 보좌진이 포함된 의료보험제도개혁특별위원회를 부인 힐러리에게 맡겼다. 이 위원회의 상근 공무원은 500명을 넘었다. 빌 클린턴은 전 국민 건강보험 실시가 새로운 정부의 주요 정책 중에서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런 과업을 부인에게 공식적으로 맡겼던 것이다.
그달 27일 자 <조선일보> 17면 좌상단은 "백악관 안주인이 된 힐러리 여사가 퍼스트레이디란 칭호 외에 재무·보건후생·국방·상무·원호·노동부 장관과 예산국장 및 백악관 보좌진들이 참여하는 의료보험제도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이란 직책을 하나 더 맡게 됐다"라며 "(힐러리가) 백악관 동편에 있는 퍼스트레이디 사무실 외에 서편에 별도의 사무실을 하나 더 배정"받게 됐다고 전했다.
별도의 사무실이 설치되는 위치도 주목을 끌었다. "서편에는 안보보좌관과 경제심의회 의장 등 이른바 백악관 실세들의 사무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주요 정책결정은 대개 서편 사무실에서 나오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라고 위 기사는 말한다.
한국 인권에 관심을 표하며 박정희 정권과 대립했던 지미 카터 대통령의 부인인 로잘린 카터도 국정에 깊이 개입했다. 지미 카터가 박정희 정권과의 갈등 속에서 한국을 방문하기 이틀 전 발행된 1979년 6월 27일자 <조선일보> 4면 특집은 "로절린은 아내 노릇 이전에 각료회의에 업저버로 참석하는가 하면, 때론 카터의 특사 자격으로 외국을 순방하기도 하고, 카터의 연설 초고에 조언을 하는 고위 보좌관이며, 의회에 나가 사회복지문제에 관해 증언을 하기도 한다"라고 보도했다.
공식 직함을 갖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모습은 카터의 전임자이자 닉슨 게이트 당시의 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아들에게서도 발견된다. 1975년 7월 21일 자 <타임>지가 23세 된 잭 포드의 백악관 근무를 상세히 보도했다.
그달 22일자 <동아일보> 3면에 전재된 <타임> 기사는 "포오드 대통령의 보좌관이 된 그의 아들 잭은 포오드와 환경문제에 관해 충돌될 때는 말다툼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고 한 뒤 "잭은 포오드 대통령의 차기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 획득을 위한 전임운동원으로 일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타임>은 포드의 둘째아들인 잭 포드의 백악관 근무를 이렇게 묘사했다.
"잭은 백악관의 간부직원회의에 동석하고 각종 국회의원 그루웁과의 회의에도 참석하며 그의 아버지와 한두 사람들의 중요 보좌관들과의 축소회의에도 자리를 함께한다."
가족들이 대통령을 보좌하는 모습이 포드·카터·클린턴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백악관 내의 생활공간이 아닌 집무공간에서 이들을 발견하는 것은 다른 행정부 때도 쉬운 일이었다. 작년에 <법학연구> 제23권 제3호에 실린 이철호 남부대 교수의 논문 '대통령 배우자의 법적 지위'에 이런 대목이 있다.
"미국에서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부터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까지 링컨, 가필드, 시어도어 루스벨트, 하딩, 쿨리지, 후버, 케네디, 린든 존슨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들이 자신의 친자식이나 양자, 양녀, 조카와 조카의 자녀, 동생, 며느리, 사위, 사촌, 혹은 퍼스트레이디의 동생, 조카 등에게 백악관의 일자리를 주었다. 대통령 친인척의 백악관 일자리는 개인비서 내지 개인 보좌관이 가장 많았다. 또한 대통령의 친인척들이 대통령 주치의나 선거참모, 퍼스트레이디의 비서 등에 기용되어 활동했다."
미국에서도 대통령의 가족들이 종종 구설수에 올랐다. 친인척의 대통령실 정식 근무가 한국보다 많은 나라에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전두환 때의 이순자 사례나 지금의 김건희 사례 같은 핵폭탄급 스캔들이 미국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한국에선 대통령 가족이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은 이를 법률제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미국은 제한적으로나마 이를 법률 조문으로 다룬다. 위 논문에 인용된 미국연방법 제3편 제105조는 이렇게 규정한다.
"대통령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는 데 대통령의 배우자가 대통령을 지원하는 경우 대통령에게 부여되는 지원 및 서비스가 대통령의 배우자에게도 부여된다. 대통령에게 배우자가 없을 경우에는 이러한 지원 및 서비스는 대통령이 지정하는 가족에게 제공된다."
▲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하와이를 방문한 김건희 여사가 지난 7월 8일(현지시간) 미국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에 도착해 공군 1호기에서 내린 뒤 하와이 주지사 부부 등 영접 인사를 만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이와 달리 국민주권국가의 대통령 가족은 민주적 정통성을 전혀 갖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이 국정에 관여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대통령과의 거리가 권력의 척도'라는 인식에서도 나타나듯이, 대통령과 지근거리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몸을 맞대고 사는 가족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한국이 대통령 가족의 지위를 법제화하지 않는 것은 대통령 가족은 민주적 정통성이 없다는 인식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대통령 가족의 지위를 제한적으로나마 법제화하는 것은 이들의 국정 개입을 막을 길이 없다는 현실적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식 시스템은 자칫하면 현대판 왕족제나 귀족제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한계를 띠는 시스템이다. 한국식 시스템은 대통령과 그 가족들에게 철저한 자기관리를 요구한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전두환 때와 지금 목격되는 것처럼 정권 자체가 위기를 맞게 된다. 한국식 시스템의 허점은 여기에 존재한다.
1980년 5·18 때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전두환이 한풀 꺾이게 된 것은 1982년 5월의 장영자 사건을 계기로 이순자 일가족이 국민적 비판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지금은 김건희 리스크가 대통령 지지율을 10%대까지 떨어트리고 있다. 한국식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수술하거나 보강하지 않으면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는 대통령 가족이 등장할 때마다 대한민국은 지금과 같은 위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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