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 안 그럴게요", 그 말 들으며 서글퍼진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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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주 기자]
얼마 전의 일이다.
새벽에 초등학교에 나가 우유 배분 알바를 지난 8월 시작한 나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열심히 우유를 나르고 있었다(관련 기사: 압구정동에 살아도 알바를 나갑니다 https://omn.kr/29xtt ).
▲ 남는 우유 학교 우유 급식용 우유. 종종 아이들이 마시지 않은 '남는 우유'가 생긴다. |
ⓒ 우현주 |
나는 살짝 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남는 우유는 폐기 대상이라 집에 가져가고는 있었지만, 우유가 계속해 쌓이는 바람에 좀 처치 곤란이던 참이었다. 그래서 아저씨가 우유를 마셨다니 손이 가벼워져서 도리어 고마울 판이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목이 말라 그랬다' 며 연신 사과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이렇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순간 나는 아저씨의 말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할 말을 찾는 사이 아저씨는 총총 다시 사라졌다.
아저씨의 말이 그 후에도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렇게 말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우유를 마음대로 가져가서 미안하게 생각할 수는 있지만, 뭔가 너무 과한 것 같았다. 마치 본인이 주제 넘는 행동을 해서 잘못했다고 하는듯한 자세였다.
이제 다시 보이는 학교라는 세계
학교에서 일을 시작하다 보니 학교라는 세계가 어릴 때와는 다르게 보였다. 어릴 때에는 학교에는 단지 두 부류의 사람만 있었다. 선생님과 학생. 물론 그때도 수위 아저씨가 있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식당 매점 노동자들(주로 아주머니들이라 불렀다)도 있었지만,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그때는 우리, 즉 학생이 모든 걸 다 했다.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고, 우유도 직접 날랐다. 칠판을 지우는 것은 물론, 교실 청소도 당연히 학생이 하는 거였다. 교실 뿐 아니라 화장실 청소, 화단 청소, 계단 청소도 반마다 나누어서 했다(물론 '해야 하는 것'과 '제대로 했느냐'와는 다른 문제겠다).
요즘은 선생님과 학생 이외에도 학교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시설만 따로 관리하시는 분(이분의 직함도 제대로 모른다. 아침에 내가 우유를 나를 때 항상 화장실을 손보고 계신다. 이것저것 학교 기물을 수리하시는 분 같다. 이 글을 쓰며 교육청 사이트에 들어가 찾아보니 '교육공무직 학교 시설관리직원'이라고만 나온다)이 있다.
그 외에도 급식 조리원, 배식원, 보안관, 지킴이…. 이외에 급식 식자재 및 내가 하고 있는 우유 납품 업체 등 많은 사람이 학교와 연관을 맺고 있다. 나를 포함해 이들에게 학교라는 곳은 단지 하나의 '일터'일 뿐이다.
학교가 일터가 되면, 이 세계에는 분명히 층위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선생님과 학생은 그 위에 있고 나처럼 몸으로 일하는 사람은 그 밑에 존재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학교 안의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랄까.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속에서 일하는 나는 내심 그 차이를 감지하게 된다.
일단 호칭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여성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선생님'과 '여사님'으로 나뉜다.
지금은 그나마 존중하는 의미에서 '여사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내가 어릴 때는 그냥 '(매점 혹은 식당) 아줌마'였다. 나는 학원에서 알바하며 '선생님'이라고도 불려보고, 학교 급식 배식, 방역 일을 하면서 '여사님'도 되어 봤다. '선생님'과 '여사님'일 때의 기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 학교 안에서 느끼는 세계(자료사진) |
ⓒ tokyo_boy on Unsplash |
아들이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영양사 선생님이란 식단표를 짜는 분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학교에서 학생들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 즉 모든 식자재 납품을 관리하는 분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우유 관리 말고도, 모든 급식 식재료는 영양사 선생님의 감독을 받는 거다.
나는 아침에 일찍 나가서 일하고 오기 때문에, 영양사 선생님 얼굴을 직접 뵌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매일 아침 우유를 나르면서 나는 영양사 선생님의 방에 우유 2팩을 놓고 온다. 처음에는 선생님 드시라고 두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유 검수용'이었다.
또 한두 번 우유 수량을 잘못 계산해서 놓고 온 날, 업체를 통해 지적을 받았다. 그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감독을 받는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그 존재감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 영양사 선생님은 무의식중에 내게 급식실이라는 세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식자재와 사람들을 관리하는, 왕 같은 존재 말이다.
아무리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선생님'과 '여사님'의 차이는 좁힐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른이 되어 일터로 다시 간 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여사님들의 세계'에서는 서로 서로 다 같은 게 아니었던가?
옛 '수위 아저씨'가 나에게 사과하는 모습은, 어쩐지 학교 블루 칼라에서의 세계에서도 다시 층위가 나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아저씨의 모습이 낯설고 조금은 더 서글펐다.
그 날 이후엔 그 분과 다시 마주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아직도 입에 머금고 있다.
'아저씨, 다음에 또 목이 마르면 그냥 우유 드세요. 괜찮아요. 저한테 너무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다음에 뵙게 되면 꼭 이 말을 전해 드려야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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