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산단]⑤산책로 걷다 보니 어느새 산단…“밤낮 사람 머물러야”
“고철이 나뒹굴던 공장 지역이 이젠 거대한 공원으로 변모한 것 같아요.”
스페인 빌바오의 한 수변 공원에서 만난 주민 욘씨(66)는 "이 공원은 빌바오 주민들이 쉬고 여가를 즐기는 소중한 공간"이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평일 오후 노을이 가득한 네르비온강변 산책로를 따라 달리기를 하거나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그는 "몇 년 전까지 폐공장과 철제 창고가 늘어서 있던 곳"이라면서 "이렇게 달라졌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24일 아시아경제가 찾은 빌바오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1970년대까지 철강·조선업이 발달했다. 네르비온강 인근에 즐비한 대규모 제철소, 광산, 조선소 등이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라는 빌바오의 위상을 보여줬다. 빌바오가 고꾸라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철강 자원이 고갈되고 한국의 포항제철(현 포스코) 등과의 경쟁에서도 밀리면서 대량 해고 사태가 발생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던 빌바오는 199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위기 극복에 나섰다. 1991년과 1992년 ‘메트로폴리 30’와 ‘빌바오리아 2000’ 등 민관협력체가 설립돼 도시 혁신을 주도했다. 중공업에서 탈피해 서비스·관광업과 첨단산업 중심의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빌바오의 소로사우레 지역은 이 프로젝트의 상징성을 띠고 있는 공간이다. 2.5㎞ 길이의 기다란 섬인 이곳은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쓸모없는 고철들이 나뒹굴던 공장 지대였지만 현재는 첨단산업단지, 스마트시티로의 변신을 준비 중이다. 섬 양 꼭짓점에는 두 개의 기술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빌바오시에 따르면 이 기술단지들은 소로사우레섬에서 창출되는 경제적 가치의 4분의 1을 차지하게 될 전망이다. 현재 전체 프로젝트의 25%가 개발을 마쳤고, 50%는 협상 완료 후 개발을 앞두고 있다.
눈여겨볼 점은 섬 내 상당한 면적을 녹지에 할애했다는 것이다. 소로사우레섬에는 680㎡ 규모의 연못과 400그루 이상의 나무, 산책로, 공원이 조성되고 있다. 여기엔 환경 개선을 통해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겠다는 빌바오시의 철학이 담겨 있다. 빌바오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핵심은 산업화 시기 오염된 강과 공장 부지를 정화하고 대규모 녹지 공간과 공공시설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빌바오의 도시계획을 총괄하는 아시에르 아바운사 빌바오시 의원은 “가장 먼저 과거 산업화에 따른 오염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며 “돌멩이가 많고 오염이 심해 개발하기 어려운 땅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오래된 건물을 철거하고 토지를 단단하게 하는 작업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녹지 확보는 단순히 환경 차원만은 아니었다. 주민들의 삶의 질이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이도이아 포스티고 메트로폴리 30 의장은 “빌바오가 속한 바스크주는 바르셀로나 등이 있는 카탈루냐주와 달리 재정적 권한이 많은 지역”이라면서 “세금을 내는 시민들을 위해 좀 더 탁월한 것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부를 재창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아바운사 의원은 “외부 사람들이 찾는 곳이어야 상점 등 편의시설이 들어서고 인프라가 확대되는 선순환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섬 안에 대규모 주거단지를 조성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낮에만 사람이 많고 밤에는 텅 비어 버리는 도시가 아니라 온종일 누군가가 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티고 의장은 “이곳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은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까지 섬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는 주택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대학과 기업을 유치하고 대중교통 여건 개선에도 힘을 쏟고 있다. 아바운사 의원은 “산업단지만 덩그러니 있다면 ‘많은 세금을 왜 투자해야 하는가’라는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면서 “대학생, 직장인 등 다양한 사람이 살고 외지인도 질 좋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다면 흔들리지 않고 투자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공공투자를 통한 개발이 속도를 내면서 민간 투자도 늘었다. 아바운사 의원은 “공공 부지에 대한 개발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사유지에 대한 주민 설득도 쉬워졌다”며 “초기에는 100% 공공투자였지만 마지막 단계에 이른 현재는 70%가 민간 투자를 통해 추진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포스티고 의장은 “대규모 개발은 우리(공공)만의 투자로는 불가능하다”면서 “지역은 물론 국제적 차원의 파트너십을 구축해 순조롭게 (투자를) 진행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편집자주
한국에는 버려진 땅이 있다. 넓이만 2449만㎡로 여의도 면적의 5.44배 규모다. 이 땅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방치돼있다. 바로 '산업단지' 이야기다. 산단은 1960년대 울산공업단지 개발을 시작으로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견인한 주역이다. 하지만 우후죽순 들어선 탓에 지금은 고질적인 미분양에 시달리고 있다. 새 산단을 짓는 데만 몰두하면서 기존 산단은 심각한 노후화 문제에 직면했다. 아시아경제는 '버려진 산단' 기획을 통해 국내 산단 현황을 살펴보고 해외 사례를 통해 한국 산단의 발전 방향을 모색한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스페인 빌바오=권현지 기자 hj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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