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푸 만드는 화학과 교수… “과학기술로도 큰돈 벌 수 있죠”
의대 쏠림 현상에 이공계 인재 육성이 국가적 난제로 자리 잡고 있는 요즘, 이공계 출신도 ‘잘 나가는’ 회사 대표가 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하는 사례가 속속 나오고 있다. 염색 샴푸를 개발한 데 이어 탈모 샴푸 ‘그래비티(사진)’를 출시한 이해신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과 교수가 대표적이다. 이 교수는 이공계 출신 과학자가 창업했을 때 한국에서도 기업가치 수백억원의 회사가 나올 수 있다며 똑똑하고 야망 있는 학생들이 이공계로 모여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8월 ‘폴리페놀 팩토리’란 회사를 창업한 이 교수는 탈모 샴푸 품절 대란의 주인공이다. 지난 9월 홈쇼핑에 데뷔하자마자 샴푸 2만여병을 팔았고, 지난달에는 방송 40분 만에 3만3000병을 팔아 10억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본사에서 만난 이 교수는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라며 “화학과 교수가 될 때만 해도 전공인 약물 전달학, 생체 재료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샴푸 파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탈모 샴푸 개발은 폴리페놀 연구에서 시작됐다. 폴리페놀은 식물에서 발견되는 화학 물질로, 항산화 성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교수는 폴리페놀의 특징 중 특유의 접착력과 단백질을 포함한 고분자와의 결합력에 주목했다. 홍합이 물속에서도 돌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접착력을 연구하던 그는 단백질에 잘 붙는 폴리페놀의 성질을 이용해 지혈제, 샴푸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홍합이나 담쟁이넝쿨에서 발견할 수 있는 폴리페놀이 단백질에 잘 붙는 성질을 이용하려고 했다”며 “처음에는 머리카락에 응용할 생각을 못 했는데, 접착제를 연구하다 보니 머리카락을 붙이는 방법으로도 모발 이식이 가능하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탈모에 주목했다. 남성 탈모의 원인은 대부분 호르몬에 따른 것이라 특정 부위에 건강한 모발을 이식하면 되지만, 여성은 전반적으로 모발이 빠지기 때문에 모발 이식이 어렵다. 탈모를 겪는 여성들이 가발을 찾는 이유다. 이 교수는 “샴푸를 두피 위주로 감으면 모공에 폴리페놀 성분이 붙어서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다. 모발이 빠지는 양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이라며 “특히 40~50대 들어서 급속도로 머리가 얇아지는 분들은 명확하게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폴리페놀 팩토리는 폴리페놀을 이용한 속눈썹 접착제, 생리대 개발도 진행 중이다. 긴 머리카락을 중간에서 잘라 머리숱이 적은 부위에 모발을 붙이는 식으로 이식하는 새로운 방식의 모발 이식 방법도 연구하고 있다. 모근이 없이도 폴리페놀 성분의 접착제를 이용하면 모발 이식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 교수는 “폴리페놀 팩토리의 슬로건은 ‘일상의 혁신’이다. 일상적인 제품에 폴리페놀을 적용해 혁신을 이루려고 한다”며 “카이스트에서도 한 개의 실험실마다 하나의 창업 기업을 만들라고 독려한다. 과학계에서도 테슬라 같은 성공적인 창업 모델이 탄생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고 있다”고 말했다.
탈모 샴푸 출시 전 이 교수를 유명하게 만든 건 염색 샴푸 ‘모다모다’였다. 갈변 현상을 샴푸에 접목해 염색 기술을 개발한 그는 카이스트에 기술이전을 했고, 스타트업 모다모다가 기술을 활용해 샴푸를 출시했다. 하지만 모다모다에서 기술 사용료를 지급하지 않아 학교 측이 모다모다에 소송을 제기했고, 최근 모다모다가 학교 측에 사용료를 지급하는 것으로 최종 합의했다. 이 교수는 모다모다 사태 이후 직접 원천 기술을 활용한 제조공법을 개발했고, 교원 창업으로 폴리페놀 팩토리를 세워 지분 절반 이상을 보유한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이 교수는 폴리페놀 팩토리의 성공이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를 바란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우리 제품을 홍보하는 것보다는 과학 기술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을 홍보하고 싶다. 의대에 진학할지, 이공계에 진학할지 고민하는 학생들이 이공계를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으면 좋겠다”며 “이공계에서 과학 기술로 스타트업을 창업해 100억, 200억씩 기업 가치를 평가받는 경우가 많이 나오고 있다. 똑똑하고 야망 있는 학생들이 이공계에 와야 한다”고 말했다.
학부생 때 학점을 잘 받는 ‘모범학생’이 아니더라도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교수는 학부 학점이 낮아 3수 끝에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한 교수님이 “너는 연구에 소질이 있다”고 재능을 알아봐 준 덕에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연구를 하면서 성과를 냈다. 이 교수는 “자신의 연구 분야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계속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며 “기초를 확실하게 다지면 응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다른 분야를 향한 ‘창’을 늘 열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정 분야를 파고들지 않아도, 다른 분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또 다른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창문을 닫지 말라’고 말한다. 나만 해도 학부생 때 생명과학과를 다녔지만 지금은 화학과 교수를 하면서 샴푸를 만든다”라며 “이제는 폴리페놀 팩토리를 건실한 기업으로 만들어 과학계에서 성공한 창업의 사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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