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트럼프가 전쟁을 끝내는 방식
당장 끝낸다고 장담한 트럼프
당사자 불만 많은 협상안마저
어디로 튈지 몰라 수용하게 돼
韓, 예측불확실성에 불안해도
큰 그림 보며 하나씩 풀어가야
2022년 2월 24일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오늘로 994일째다. 참혹했던 6·25전쟁이 북한의 전면적 남침에서 휴전 협정 체결까지 만 3년1개월, 날짜로 1129일 동안 진행됐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시간이다. 러시아는 개전 후 며칠 안에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점령해 친러 정부를 세우는 속전속결을 계획했지만 어림없는 오산이었다. 미국 국방부는 지난달 기준 러시아군 사상자를 60만명 이상, 러시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군 사상자를 50만명 이상으로 추정했다. 정확한 숫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전쟁터에서 죽거나 다친 군인이 100만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3년을 끈 전쟁은 국제적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있다.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에 698억 달러(97조8000억원)의 군사원조를 포함해 1060억 달러(148조5000억원)를 지원한 미국에서조차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우크라이나를 돕는 이유를 묻는 여론이 높아졌다. 군사원조 470억 달러(65조7000억원), 총 1330억 달러(186조1000억원)를 제공한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들의 고민도 커졌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여름 악화된 국제여론을 되돌리기 위해 지원받은 최고의 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를 보내 러시아 쿠르스크주 일부를 점령하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역부족이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러시아군은 잠시 주춤했지만 전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동부 루한스크·도네츠쿠주(돈바스 지역), 남부 자포리자·헤르손주에서 우크라이나군은 곤경에 빠졌다. 러시아는 여전히 우크라이나 전체 면적의 약 20%를 점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4시간 안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장담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등장했다. 미국 언론이 전하는 트럼프의 계획은 단순하다. ‘전선을 현재 상태에서 고정하고 1300㎞에 달하는 비무장지대를 설치한다. 우크라이나는 앞으로 20년 동안 NATO에 가입하지 않으며, 대신 미국이 무기를 제공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토록 한다.’ 국토의 20%를 잃게 되는 우크라이나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2015년 독일과 프랑스의 중재로 체결된 2차 민스크협정보다 후퇴해 러시아도 만족할 수 없는 결론이다. 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의 협상력은 결국 돌파할 것이다. 젤렌스키의 용돈이 끊어진다는 트럼프 주니어의 협박에 품격은 없지만 이보다 NATO 동맹국들의 속마음을 잘 표현한 말은 없다. 첨단무기를 주면서 사용을 제한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이중행보에 염증을 느낀 미국인들이 진짜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를 대하는 방식은 거칠다. 그러나 협상의 목표는 허황되지 않다. 반대로 냉정하고 계산적이다. 협상이 이뤄지면 미국은 당장 돈을 안 줘도 된다. 유럽은 키이우가 친서방 정권을 유지하는 한 러시아 방어선이 우크라이나 국경 안쪽으로 100㎞쯤 후퇴해도 아쉬울 게 없다. 트럼프라는 ‘황당한 인물’ 때문에 조금 흔들려도 동맹을 지킨다는 NATO의 명분은 훼손되지 않는다. 러시아는 영토를 넓혀 10년을 끌어온 돈바스 분쟁을 마무리지을 수 있다. 합병한 크림반도의 안정성도 높아진다. 전쟁터가 돼 참혹한 피해를 본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이익이다.
트럼프의 협상 방식은 우리에게도 다를 게 없다. 지정학적 힘의 균형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익을 내겠다는 의도가 명확하다. 지난해 445억 달러(62조3000억원)의 대미 무역흑자를 기록했고, 독일·일본보다 방위비분담금 비율이 낮은 한국은 좋은 ‘머니 머신’이다. 협상의 무기는 언제라도 한반도 정세를 뒤집을 수 있다는 예측불허성이고, 파병이라는 초강수를 두며 미국과의 담판을 준비하는 북한은 유용한 지렛대다.
하지만 트럼프는 2018년 5월 이란과의 핵협정인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에서 탈퇴하기까지 무려 16개월 동안 검토를 거듭했다. 2016년 선거운동을 할 때는 당장 탈퇴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행동은 매우 신중했다. 이에 비하면 바이든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이 오히려 충동적이었다. 트럼프가 취임 직후부터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무너뜨릴 정책을 서둘러 추진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오히려 이를 앞세운 다른 공세에 대비하는 게 먼저다. 북한의 핵·미사일은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마냥 끌려다닐 수는 없다.
고승욱 수석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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