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홍길동과 마리안느
엉뚱한 공감능력 대신 ‘쿨’한 생각은 어떨지
국제운전면허증 발급을 신청하러 갔다가 의아한 걸 봤다. 신청서 견본에 있는 여성 모델은 2000년생으로, 항공사 승무원 지원서에 써도 무방할 만큼 현대적인 분위기를 풍겼는데(이름을 붙이자면 나세련, 정이슬 정도), 이름이 ‘홍길순’이라 쓰여 있는 것이었다. 한가한 소설가로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우리는 없는 홍길순을 창작해 내면서까지, 서류 양식에 늘 홍길동을 쓰길 고집하는 걸까. 그 시초를 알 수 없을 정도니, 이 정도면 집착이 아닐까 싶다. 행여나 홍길동을 쓰길 원한 공무원은 업무평가가 나빠, 홍길동 같은 의적이 자기 직무평가서를 훔쳐가주길 바랐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임꺽정도 있고, 전우치도 있는데, 대체 왜 홍길동인가.
나처럼 답답한 이가 많았나보다. 찾아보니 이에 관한 기사를 쓴 이도 있었고, 아예 팀을 꾸려 취재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 모두 전남 장성군에 그 이유를 문의했는데, 그곳에 홍길동의 생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니,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보시죠?’라는 식의 황당하다는 반응을 접해야 했다.
인간은 의문에 휩싸이면 불면에 시달리고, 이는 건강은 물론 삶의 안위까지 위협한다. 그래서일까. 국민의 안녕을 살피는 행정안전부에 문의한 이들은 마침내 환영받으며 근사한 답변을 들었다. 이유인즉 ①홍길동은 한국인 대부분이 아는 이름이고 ②허구성이 더해진 고전 속 인물이며 ③후손이 항의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④동명이인도 별로 없어 소송당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소수의견으로는 ‘홍길동’ 이름에는 초·중·종성이 다 쓰여 이름 칸이 꽉 차 안정감을 선사한다는 점도 꼽혔다.
이렇게 연유를 파악하자 정반대의 인물이 떠올랐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여성 ‘마리안느’. 혁명으로 공화국을 건설한 프랑스는 국민을 통합할 존재가 필요했다. 이에 가상의 인물을 창조해냈는데, 그가 바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등장하고, 1848년 2월 혁명 때 공화국의 상징으로 채택됐으며, 현재는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의 모델인 ‘마리안느’다. 한데 그 이름은 실로 간단하게 붙여졌다. 당시 가장 흔한 여성 이름이 ‘마리’와 ‘안느’였던 것이다. 굳이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 ‘영희 순자’ 정도가 된다. 프랑스는 소송을 걱정한 우리와 달리 가장 흔한 이름을 택한 셈이다.
만약 한국도 프랑스처럼 혁명으로 수립된 국가라면, ‘영희 순자’ 같은 상징적 인물을 만들어냈을까. 그렇다면 프랑스가 각 시청 앞에 ‘마리안느 흉상’을 내걸 듯 우리도 ‘영희 순자’ 조각상을 관공서 앞에 세우고, 온갖 서류 견본에도 홍길동·홍길순 대신 ‘영희 순자’로 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면 어느 날 새로 부임한 구청장이 견본 작성 담당자를 찾아와 “김 부장. 양식에서 ‘영희’ 좀 빼. 우리 모친 존함이 영희인데, 함부로 불리는 걸 아주 불편해하셔. 남은 생 얼마 안 남은 90세 노모의 소원 좀 들어주시게나” 할 수도 있다. 이거 참, 난처하다. 그래서 ‘순자’만 견본 양식에 남았는데, 이번에는 대뜸 도지사가 찾아와 “거, 이거 볼 때마다 천국으로 떠난 우리 애 엄마 순자씨가 떠올라, 내 눈이 마를 날이 없어”라고 하면 또 골치 아파진다.
요컨대, 상상력과 공감능력이 풍부한 한국인에게는 홍길동처럼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이름이 여러모로 편한 것이다(그런 점에서 보자면, 어딘가에 있을 홍길동의 후손들은 실로 쿨한 가문의 사람들이다. 홍길동은 조선왕조실록 중 연산군 6년 때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니까).
그나저나 이런 생각은 정말 한가해서 하느냐고. 그럴 리가. 한 사회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그 와중에 발견한 불합리를 개선하고 싶은 의지 때문이며, 그것이 내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할 일이라 믿기 때문… 이라면 너무 거창한가. 그렇다면 그냥 한가하기 때문이라 믿으시길. 나 역시 홍길동의 후손만큼 쿨하니까.
최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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