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컷] 물파스와 때수건, 런던 간 까닭

나원정 2024. 11. 13.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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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문화부 기자

한국식 때수건, 물파스가 영국 런던에 등장했다. 지난달 말부터 런던 영국영화협회(BFI) 극장에서 열린 특별전 ‘시간의 메아리: 황금기와 뉴시네마의 한국영화’ 자리에서다.

“이걸로 때를 밀어주면 아이들이 괴로워했던 추억의 물건입니다. 이 물파스는 상처가 난 데나 눈에 바르면 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현지서 이렇게 소개한 사람은 장준환 감독.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2003, 사진)가 특별전에 초청되자, 애장품을 챙겨왔다. 극 중 주인공 병구(신하균)가 외계인이라고 믿는 화학회사 사장(백윤식)을 납치해 지구를 지켜내는 무기가 바로 두 물건이다.

산업재해로 부모를 잃은 병구의 황당한 망상 같지만, 뒤통수를 치는 영화다. 권력의 논리로, 사람이 사람에게 인륜을 저버린 일들을 자행해온 인류 역사를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외계인의 계략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 영화 ‘1987’(2017)로 700만 흥행을 거둔 장 감독은 이 데뷔작 땐 7만 관객에 그치며 실패작이란 낙인을 받았다. 뒤늦게 진가를 알아본 국내외 영화팬, 영화제 수상이 잇따랐다. 올해 할리우드판 리메이크 제작에 돌입한 배경이다. 런던 상영관도 꽉 찼다. 때수건·물파스 장면에선 사전 설명 덕에 온 관객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국영상자료원이 협력한 특별전은 1960~2000년대 총 41편의 한국영화를 70회 이상 상영한다. 영국에선 역대 최대 규모다. 그저 영화 한 편이 아니라, 우리 문화를 통째로 선보이는 자리다. 한국 대중에 미처 사랑받지 못한 숨은 걸작이 색다른 시각으로 발굴될지 모른다. 개봉 첫 주도 안돼 ‘망작’ 낙인을 찍곤 하는 요즘, 이 남다른 데뷔작의 팔자를 자꾸 곱씹게 된다.

나원정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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