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1400 다 깨졌다, 금융 ‘트럼프 쇼크’
도널드 트럼프(사진) 전 대통령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한국 증시가 계속 하락하고 원화가치도 맥을 못 추고 있다. 닷새째 ‘트럼프 랠리’를 이어가는 미국 증시와 달리 코스피는 지난 8일 이후 사흘 연속 하락해 급기야 12일 2500선마저 내줬다. 원화가치도 이날 ‘트럼프발 수퍼달러(달러 강세)’ 태풍에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꼽은 1400원 선을 2년 만에 뚫고 미끄러졌다. ‘트럼프노믹스(트럼프 정부의 경제 정책)’가 한국 기업에 특히 더 큰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시장의 부정적 관측에 외국인 투자자 이탈 속도도 빨라졌다.
1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코스피는 전일 대비 1.94% 하락한 2482.57포인트에 장을 마쳤다. 코스닥 역시 2.51% 급락해 710.52포인트로 마감했다. 코스피가 2500선 아래서 마감한 건 지난 8월 5일 ‘검은 월요일’ 이후 약 석 달 만이다.
주가 하락은 외국인과 기관이 주도했다. 이날 외국인은 코스피 시장에서 2306억원을, 기관은 1095억원을 순매도했다.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와 기준금리 인하 등 증시에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됐지만, 증시 큰손의 ‘셀(Sell) 코리아’는 지속했다. 특히 한국 증시를 대표하는 반도체 업종의 주가 하락세가 두드러졌다. 삼성전자는 3.64% 하락한 5만3000원에 마감해 52주 신저가를 썼고, SK하이닉스 역시 3.53% 급락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값은 주간거래 종가(오후 3시30분) 기준 전날보다 달러당 8.8원 하락한(환율은 상승) 1403.5원에 마감했다. 주간 시장에서 종가 기준으로 1400원 선이 깨진 것은 2022년 11월 7일(1401.2원) 이후 처음이다.
원화값이 속절없이 추락한 것은 수퍼달러 영향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7년 집권 1기 시절처럼 관세 장벽을 쌓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울 것으로 예상하면서 미국 달러 가치가 솟구쳤다. 최근 공화당이 백악관을 비롯해 의회의 상·하원을 장악하는 ‘레드 스위프’가 점쳐지면서 달러 몸값은 더 세졌다. 트럼프가 내세운 고관세와 감세, 이민정책 등의 공약이 현실화될 수 있어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11일(현지시간) 105.54로 지난 7월 2일(105.72) 이후 넉 달여 만에 가장 높다.
원화가치 하락 폭이 가팔라지면 내년 경제 성장에 제동을 거는 ‘위험 신호’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과거 달러당 원화값이 1400원대로 밀려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2년 미국 통화 긴축기 등 세 차례뿐이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 리스크(위험)가 앞으로도 수출 중심국인 우리나라 증시에 계속 반영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트럼프 행정부가 10%의 관세만 매겨도 한국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은 10% 떨어진다”며 “다른 나라보다 수출 기업 비중이 큰 한국 증시가 이 같은 보호주의 현실화 우려를 더 크게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재선이 확정된 지난 6일(현지시간) 이후 미국과 한국 증시의 엇박자는 심화하고 있다. 스탠더스앤드푸어스(S&P)500과 나스닥 등 미국 주가지수는 지난 11일까지 닷새째 상승 중이지만, 코스피는 사흘 연속 하락했다.
수출 많은 한국, 트럼프 관세폭탄에 더 취약
트럼프 2기는 확정된 순간부터 한국 증시에 악재로 작용했다. 1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 이후 사흘 동안 외국인과 기관은 코스피와 코스닥 시장에서 총 1조940억원어치(외국인 3148억원, 기관 7792억원)를 팔아치웠다. 특히 외국인은 이미 지난 8월부터 국내 증시를 떠나기 시작해 이날까지 총 14조7476억 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외국인, 석달새 15조원어치 팔아
한국 증시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부진하다. 지난 8월 5일 세계 증시가 동시에 폭락한 ‘검은 월요일(Black Monday)’ 이후 주가 회복력은 G20(주요 20개국) 중 사실상 최하위다. 코스피는 폭락일 직전 증시 개장일(8월 2일)부터 지난 8일까지 7.8% 하락해 러시아(-19.8%), 튀르키예(-17.2%)에 이어 세 번째로 낙폭이 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이고, 튀르키예가 심각한 인플레이션(10월 소비자물가상승률 48.6%)을 겪는 특수한 상황이란 점을 고려하면 한국이 사실상 최하위다. 미국(9.7%) 캐나다(9.3%) 독일(6.5%) 일본(3.6%) 호주(2.5%) 등 뚜렷한 상승세를 보인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면 더욱 초라한 성적표다.
한국 증시가 유독 부진한 이유는 증시에서 수출 기업과 반도체 업종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수출 기업의 영업이익이 전체 상장사의 70%에 달하다 보니, 트럼프식 무역 규제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IB)인 골드만삭스의 앤드루 틸턴 아시아·태평양 수석 경제학자는 트럼프의 ‘두더지 잡기(Whack-a-Mole)’식 관세 위협이 중국은 물론 한국·대만 등에도 타격을 줄 것으로 내다봤다. 두더지 잡기식 관세 정책이란 한국처럼 미국과 우호적 관계인 국가라도 미국을 상대로 무역 흑자를 내고 있다면 두더지 찾듯 찾아내 관세 인상 조치를 한다는 의미다.
원화가치 하락도 심각하다. 원화값이 맥을 못 추는 또 하나의 이유는 트럼프 집권 시 수혜가 예상되는 자산에 자금이 쏠리는 ‘트럼프 트레이드’가 있다. 국내외 투자자가 한국 시장을 떠나 미국 주식과 달러, 암호화폐에 베팅하기 때문이다. 미국 3대 주가지수가 역대 최고가 행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외국인 투자자는 한국 주식을 계속 팔아치웠다. 외국인이 원화로 표시된 한국 주식을 팔고 달러를 손에 쥐면 원화 약세는 심화한다.
엔화·위안화 등 아시아 주변국 통화가 미국 달러의 독주를 막기 어렵다는 점도 원화가치 하락을 압박한다. 중국은 경기 침체 우려에 트럼프 재집권에 따른 고율 관세 폭탄까지 겹치면서 달러 대비 위안화 가치(역내 환율)가 지난 11일 1달러당 7.2위안대로 밀려났다. 일본도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기사회생했지만, ‘여소야대’ 의회가 구성되면서 통화완화 정책으로 수퍼엔저가 이어질 것으로 시장에선 전망한다.
원화값 1430원대까지 갈수도
박상현 iM증권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행정부 2기 정책이 윤곽이 드러나고, 아시아 화폐가치가 동시에 약세를 띠면 달러당 원화값은 1430원대까지 밀려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도 “트럼프 당선으로 고관세·고환율·고물가가 다시 현실화되면 국내 성장을 제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트럼프식 관세 리스크에도 국내 수출 기업이 제품 가격 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경제 주체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자금 조달 문턱을 낮춰 생산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한편, 불필요한 규제로 인한 비용 낭비도 감축해야 한다. 특히 외국인 눈높이에 맞는 증시 환경 조성 노력을 강조했다. 국내 상장기업 역시 실적 부진을 타개하고, 주주 친화 경영을 더욱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기업 스스로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실적 개선, 주주 환원 등 밸류업 방안을 더욱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도년·염지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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