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지고 쓰러져도 다시 시작하는 오뚝이 인생 [내 인생의 오브제]
부잣집에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자랐건만 병오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큰형만 대학을 들어가고 그 밑으로 6남매는 제대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병오는 기술을 배워야겠다 생각하고 부산고등기술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문교부 산하가 아니라 체신부 산하여서 대학을 가려면 별도의 검정고시를 치러야 하는 그런 학교였다. 학교에서는 실습할 기업을 물색해야 하는데 외삼촌이 운영하는 페인트 가게에서 일했다. 요새로 치면 알바. 집안 어른의 운명이 참 기구하다. 외삼촌마저 유명을 달리했다. 병오의 나이 열아홉. 그때부터 사업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야말로 장사꾼이 된 것이다.
공직자 출신인 아버지 창식은 동네에서 배짱 하나만은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이름보다는 최배짱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그 아버지의 유전자를 가장 많이 물려받은 병오. 그 역시 배짱 하나만은 알아준다. 와이셔츠 단춧구멍 같은 작은 눈에 작달막한 키. “인상이 참 토속적이고 구수하다”고 하면 털털 웃는 최 회장. 그 외모에 대한민국 패션 리더로 자신감 뿜뿜인 걸 보면 어떤 고난이 닥쳐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다는 배짱이 있어 가능한 일인 것 같다. 학력 콤플렉스가 있을 텐데 까짓것 옷 장사는 내가 박사인데 하면서 경영학 박사 학위 네 개 받고 인생 철학 당신만 한 사람 어디 있겠는가라며 전남대는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줬다.
그에겐 도저히 잊히지 않는, 아니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 1993년 11월 23일. 교만은 화를 부르는 법. 겁 없이 벌린 사업은 남의 돈을 빌려 쓰게 되고 일순간 상황이 나빠지자 부도를 맞게 된다. “오르막만 있을 줄 알았죠. 한순간 사업이 내리막으로 곤두박질치니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어음 무서운지 그때서야 알게 됐습니다.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안방에 있는 장롱에는 빨간 압류 딱지가 붙었습니다. 순식간에 무일푼이 됐습니다.”
최 회장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포기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갖은 고생 다 해본 사람입니다. 페인트통 메고 달동네 오르막길 올라가기도 하고, 동네 빵집 운영할 땐 잠도 제때 못 자고 하루에 식빵을 세 번이나 구워 팔기도 했습니다. 제가 권투를 좀 했는데 그때 코치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힘들지. 마, 그 순간만 참아봐. 반드시 기회는 있다’고. 지금껏 제 삶을 지탱해준 말입니다. 세상 살다가 힘들 땐 늘 당시 부도난 어음을 꺼내보곤 합니다.”
부도가 날 때 했던 장사는 크라운 바지였다. 그는 그때 브랜드의 위력을 알아봤다. 부도가 나서 앞이 캄캄해도 그는 동대문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때 손댄 브랜드가 ‘비버리힐스폴로클럽’이었다. 감이 적중해 대박을 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라이선스를 받아야 하는데 자금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붙자 그는 이번에는 진짜 사업해보자며 회사를 만든다. 그게 지금의 형지. 불같이 사업이 번성하라는 의미로 불 화(火)가 세 개나 들어간 등불 형(熒), 터 지(址). 운이 따랐는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악어(크로커다일)를 만나게 되고 그 브랜드의 여성 옷을 론칭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인생 자체가 부침(浮沈)이다. 11년 전 거의 매출 1조원 하던 회사가 지금 9000억원으로 역주행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쓰러진 데서 다시 일어나고 힘든 가운데서도 희망을 찾는다. 그의 오뚝이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손현덕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4호 (2024.11.13~2024.11.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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