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직후 레임덕 온 대통령... 위기 탈출해서 한 짓

김종성 2024. 11. 1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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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시대별곡] 거대 야당 없고, 한국전쟁까지 발발... 장기집권과 폭정 이어간 이승만

[김종성 기자]

 1948년 7월 2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는 이승만
ⓒ 위키미디어 공용
한국 현대사에서 집권당이 없었던 긴 기간은 1948년 8월 15일부터 1951년 12월 23일까지다. 정부수립부터 자유당 창당까지의 3년 4개월이다. 1987년 6월항쟁과 직선제 개헌 이후에는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사례에서처럼 대통령이 대선을 앞두고 임기 말에 탈당하는 일들이 있었다. 이와 달리 1948~1951년에는 대통령이 처음부터 당적을 갖지 않았다.

집권당이 없었던 것은 이 무렵에 정당정치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1948년 제1대 총선이 군소정당들의 난립 속에서 치러진 데서도 나타나듯이, 이 시기 한국인들은 현대식 정당을 만드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한국민주당(한민당)이나 이를 계승한 민주국민당(민국당)처럼 상당한 조직력을 갖춘 보수 정당들도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대통령의 여당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1948~1951년에도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당연히 있었다. 친일세력인 동아일보사 김성수와 한민당은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 때 이승만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기반을 오래 붙들어두지 못했다. 초대 내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한민당과 갈등을 일으켜 결국 반목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여당을 갖지 못한 채로 국정을 이끌게 됐다.

여당의 부재는 정당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는 특정 계급에 기반을 두기 마련인 정당정치로부터 초연한 모습을 유지하고자 했다. 제1당의 독주를 인정하지 않는 탕평정치를 지지하는 정치인으로 비칠 만한 행보를 보인 것이다. 이와 관련을 갖는 것이 일민주의(一民主義)라는 그의 정치적 목표다. 그는 성·계급·지역 등의 차별이 해소돼 전체 국민이 균일해지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그렇게 탕평을 내세우면서도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독자 정당의 길을 모색했다. 위 기간에 그는 창당이 가능해 보일 때는 정당 필요론을 내세우다가, 여의찮으면 정당 무용론을 내세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여당이 되지 못한 대한국민당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 미군 군복 차림으로 김포공항에 착륙한 그가 해방공간에서 맨 처음 확보한 지지 기반은 그달 23일 결성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다. 약 200명이 참여한 이 단체에서 그는 회장으로 추대됐다.

독촉은 이승만 광팬들로만 조직된 단체는 아니었다. 미군정의 후원을 받고 귀국한 이승만과 안면을 익혀두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의 협의체 정도로 평가할 수 있다. 그달 25일 자 <매일신보> 기사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결의'는 만장일치로 이승만을 추대한 참여자들을 "국민당, 건국동맹, 한국민주당, 조선공산당 등 각 정당과 문화단체 200여 명"이라고 소개했다. 여운형계의 건국동맹, 김성수계의 한민당, 박헌영계의 조선공산당 등이 독촉에 힘을 보탰던 것이다.

이 단체는 이북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된 1946년 2월 8일,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와 통합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거듭났다. 1948년 12월에는 명칭이 국민회로 바뀌었다.

독촉은 이승만 광팬들을 항시 포함하고 있었지만, 위 <매일신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초기의 연합 구도를 계속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이탈자가 계속 생겨났다. 나중에는 이승만과 안면을 붉힐 필요까지는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이 협의체에 남게 됐다. 조직의 외연이 협소해지면서도 결속력이 그리 강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정부수립을 즈음한 시기의 이승만은 독촉과 함께 창당의 길을 걷고자 했다. 이 시기에는 정당 필요론으로 기울어 있었다.

1948년 9월 9일 담화에서 그는 "민주주의를 운영하려면 우리에게도 정당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은 나를 돕고 남을 해하려는 파당을 만들고자 함이 아니오"라며 "서로 다른 주의로서 민중의 복리를 위하는 2, 3 정당이 있어야 남녀노소 우리나라의 민주제도가 발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당정치에 초연한 모습을 유지하면서 여당을 만들어내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감췄던 속내를 일부 공개하면서 정당 건설을 역설했는데도, 독촉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날 발행된 <경향신문> 1면 좌상단에 따르면, 독촉은 이틀 전에 끝난 지부장회의에서 여당의 길을 포기하고 "종전대로 강력한 국민운동체로" 남기로 결의했다. 이승만과 안면을 붉힐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같은 당에서 안면 맞대고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무렵의 독촉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독촉이 불참을 선언한 가운데서도 정당 건설은 계속 추진됐다. 그 결과, 그해 11월 13일 대한국민당이 창당됐다. 1948년부터 현재까지의 역대 헌법 전문이 대한민국 주권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대한국민"이라는 용어에 "당"울 붙인 당명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당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당은 여당이 되지 못했다. 그달 14일 자 <동아일보> 톱기사에도 언급됐듯이, 이승만은 대한국민당 창당대회에 참석해 축사까지 하면서도 이 당은 자기 당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자신과 하등의 관련도 없다며 거리를 뒀다.

이 신문의 16일 자 1면 중간에 따르면, 13일 축사 때 그는 "동당(同黨)은 여(余)와 하등의 관련이 없고 다만 여의 주의를 계승하는 당"이라고 규정했다. 정당이 필요하다는 대통령의 말에 따라 힘겹게 당을 만들어주자 대통령이 엉뚱한 소리를 했던 것이다. 이 기사의 제목은 '여당? 야당? 대한국민당의 장래는 주목처'다.

축사에서 이승만은 이 당은 나의 당이 아니라면서도 여지를 살짝 남겼다. 이 당이 자신의 일민주의를 추종하는 당이라고 발언한 직후, "앞으로 여러분이 훌륭히 당의 주의·사상을 지켜나간다면 여도 많이 원조하겟스나 그러치 않을 때에는 여도 새로 정당을 만들겟다"라고 부탁 겸 엄포를 했다. 하는 것을 봐서 여당으로 인정해 주든 말든 하겠다고 말한 셈이다.

그 말은 씨가 됐다. 1948년 12월에 국제연합(유엔)이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남한에서는 보수세력의 정계개편운동이 벌어졌다. 이 와중인 1949년 1월 25일, 대한국민당은 이승만이 싫어하는 한민당과의 합당에 합의했다.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실상의 여당이 야당에 넘어간 셈이다. 이렇게 생긴 당이 민주국민당이 되고 민주당으로 발전했다.

총선 참패, 하지만...
 더글라스 맥아더와 이승만.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이승만 자택)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윤치영을 비롯한 이승만 친위세력은 한민당과의 합당 결의를 무시한 채 절차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대한국민당 존속 결의를 하고 민주국민당에 대항했다. 그러나 사실상 새로운 당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민당 잔존세력도 이승만의 공식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정당정치에 초연한 대통령의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여당을 갖고자 했던 이승만의 계획은 이처럼 계속해서 난관을 겪었다. 이로 인해 그는 리더십의 상처를 입었고 그런 상태로 1950년 5월 30일 제2대 총선을 치렀다.

잔존세력이 주축이 된 대한국민당은 210석 중에서 24석밖에 획득하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당적과 관계없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약 60명이 당선됐지만, 그래도 과반수에는 현저히 미달했다. 취임 2년을 맞은 대통령이 집권당도 없는 상태에서 이처럼 참패했으니, 나머지 2년 동안에 그는 레임덕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 시기의 그는 재선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무능한 대통령이었다.

그런 그가 결국 12년간이나 장기집권을 했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요인들 중의 두 가지가 총선 직후와 얼마 뒤 각각 나타났다.

하나는 이승만의 패배가 야당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최대 야당인 민국당도 24석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이 총선의 승자는 126석을 획득한 무소속 정치인들이었다. 참패한 이승만을 코너로 몰아붙일 만한 거대 의석을 가진 야당이 없었다는 점은 이승만 참패의 의미를 희석시켰다. 또 하나는 6월 25일의 한국전쟁 발발이다. 이는 이승만이 총선 민심이 아닌 새로운 정치환경 속에서 권력 기반을 재정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정당을 제대로 이끌 능력조차 없어 임기 2년 만에 레임덕 위기를 맞은 이승만은 민국당의 동반 패배와 한국전쟁 발발에 힘입어 위기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 중의 혼란을 활용해 마침내 '여'의 당인 자유당을 만나 장기집권과 폭정을 이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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