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고 휴게소 행담도의 눈물...도로공사를 향한 외침

심규상 2024. 11. 12.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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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사람이 살았네⑩-마지막회] 섬에서 내쫓인 사람들 "작은 역사관이라도 지었으면..."

[심규상 대전충청 기자]

 행담도휴게소 전경. 전국 고속도로휴게소 중 매출액 1~2위를 다투는 휴게 명소가 됐지만 행담도주민들의 삶의 흔적은 찾아볼수 없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근현대사아카이브
"그날은 바다 위에 일점풍도 없었다. 성자의 임종과 같이 수평선 너머로 고요히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나는 석조에 타는 붉은 물결을 멀리 보며 느꼈다. 이 외로운 섬 속,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속에서도 우리의 조그만 생명이 자라나고 있지 않은가. 그 어린 생명이 교목과 상록수와 같이 장성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이 쓸쓸한 우리의 등 뒤가 든든해지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는가!"(1935, 첫 여름, 당진에서)

소설 <상록수>를 집필한 심훈(1901~1936)의 수필 <칠월의 바다>는 이렇게 끝맺음했다.

상록수를 집필하던 1935년 그해 여름, 심훈은 당진 앞바다인 '가치내'(행담도)를 방문하고 수필 <칠월의 바다>를 썼다. 심훈은 식민지 치하에서 모진 시대 풍파에 시달리는 노파의 고단한 삶 속에서 '가치내'에서 잘 자라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며 희망과 해방의 미래를 내다봤다. 심훈은 '상록수'처럼 푸르른 조국의 모습을 88년 전 '가치내 사람들'에서 미리 봤다.

극과 극 행담도
 개발 전 행담도 마을 풍경
ⓒ 이익주
수필 속 '가치내'가 서해대교를 지나다 만나는 지금의 행담도다. 행담도에는 2000년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인 서해대교 개통과 함께 행담도휴게소가 들어섰고, 이름 그대로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行) 행담도가 됐다. '가치내'(한 번 들어가면 갇힌다)에서 '행담도'로의 변신은 극과 극으로 느껴진다.
'행담도 사람들' 또한 극과 극으로 다가온다. 종일 불이 꺼지지 않는 행담도에 정작 행담도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살던 100년의 삶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심훈의 수필 속 '어린아이' 등 한 때 수십 가구 100여 명이 살았던 원주민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관광객이 끝없이 오가던 행담도 포구 (1980년 대)
ⓒ 당진시
행담도는 원주민들에게 진주 같은 섬이었다. 갯벌에서는 굴과 바지락이 쏟아져 나왔다. 낙지, 소라, 박하지 등이 지천이었다. 굴과 바지락은 행담분교를 졸업하고 객지로 나간 아이들의 학비와 유학생활을 가능하게 한 살림의 원천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당산에 올라 멀리 아산만을 내려다보며 섬 생활의 시름과 답답함을 날렸다.

그들에게 서해대교와 행담도 휴게소는 일제강점기 문전옥답과 조상 묘를 파헤치고 굉음을 내고 달리던 칙칙폭폭 기차와 같은 존재였다. 1908년 1월 11일 <대한매일신보>는 경부선철도가 몰고 온 근대화로 전국을 떠돌며 유리걸식하고 있는 민중들의 참혹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저 농부가 삽을 메고 원하나니 시국이라 군용철도 부역하니 땅 바치고 종 되었네. 일 년 농사 실업하고 유리개걸(流離丐乞,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상황) 눈물이라.'
 행담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행담도 갯벌
ⓒ 당진시
한국민에게 철도는 양날의 칼이었다. 다른 세상을 열어 주는 길이기도 했고, 식민지 민중의 재산과 몸까지 바치는 수탈의 길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행담도에는 휴게시설이 갖춰져 전국 고속도로휴게소 중 매출액 1~2위를 다투는 휴게 명소가 됐다.

하지만 행담도 주민들에게 서해대교와 휴게소는 철도와 같은 폭력과 수탈의 상징물이다. 행담도 한복판을 동서로 쭉 가르며 서해대교가 지났다. 당시 도로공사와 시공업체는 이주대책도, 생계 대책도 없이 원주민들을 내쫓았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싸우던 주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도로공사와 공사업체 관계자들의 욕설과 폭언, 위협이었다. 행담도휴게소가 들어설 즈음에는 행담섬에 '행담도 사람들'의 흔적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동 우물, 행담분교, 새마을 주택, 행담 포구, 정겨웠던 홍화벌-큰 퉁소바위-동녘곱-마당녀 등 행담섬의 지명까지...

쫓겨나고 지워진 주민들의 넋두리 "지금도 행담도 꿈을 꿉니다"
 개발전 행담도 모습과 주변 지명
ⓒ 당진시
그렇게 행담도 사람들은 삶의 터전, 고향을 잃고 전국으로 흩어졌다. 불과 25년 전의 대한민국, 충남 당진시 신평면 행담도의 개발 방식은 일제가 경부선 철도를, 박정희 정부가 경부선 고속도로를 만들던 방식과 닮았다.

지난해 3월, 행담도 사람들 수십 명이 20여 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쏟아낸 행담도에 대한 기억과 바람은 애절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행담도에 대한 꿈을 꿉니다. 자다가 일어나 사무치게 그리워 눈물을 쏟아냅니다."
"가축처럼 내몰려 쫓겨난 상처가 떠올라 행담도휴게소에 갈 수가 없더군요."

행담도 원주민들이 바람은 한 가지다. 행담도휴게소 귀퉁이에 작은 '행담도 마을역사관'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다. 행담도에 적어도 100여 년 가까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남겨달라는 하소연이다.
 매립돼 사라지기 전 큰 퉁소바위 모습(2001년 6월)
ⓒ 당진시
지난해 10월, 당진시가 나서 임시방편으로 행담도 내 충남도 홍보관(신평농협 로컬푸드 행복장터) 앞에 행담도 옛 사진을 새겨 전시했다. 지난 8월에는 주민들의 구술과 사진 자료를 모아 구술 증언록과 영상을 제작했다.
지난해 6월, 김태흠 충남도지사는 당진시청 대강당에서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한 '당진 시민과의 대화' 자리에서 주민들의 건의를 받고 "행담도휴게소 내 행담도 역사기록관을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김 지사는 이날 배석한 충남도청 관련 직원에게도 "충남도와 당진시가 예산을 투입해 (행담도 관광안내소 내) 공간을 활용해 (주민들의) 역사 기록물도 전시하고 관광진흥도 될 수 있도록 하라"고 현장 지시하기도 했다.
 행담도 초가집 (1970년 대)
ⓒ 당진시
하지만 더는 진전이 없다. 충남도와 당진시 모두 한국도로공사에서 행담도 휴양지 개발 사업을 재추진하면 그때 가서 '행담도 마을역사관'을 요구해 마련하겠다는 장기 계획이다.

행담도 원주민들은 도로공사에 행담도 휴양지 개발과는 별개로 당장 실향의 아픔을 달래줄 '마을 역사관'(마을사 전시관)을 조성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행담도휴게소 뒤편에는 한국도로공사 서해대교 홍보관(안전센터) 건물이 있다. 홍보관에는 서해대교 전경과 준공 당시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서해대교 홍보관'을 행담도 마을 역사 중심의 '행담도 마을역사관'으로 재단장하면 어떨까.

행담도 휴게소 왼쪽에는 충남도 소유의 충남도 홍보관(신평농협 로컬푸드 행복장터)이 있다. 도로공사와 충남도, 당진시가 충남도 홍보관의 일부 공간을 행담도 마을 역사관으로 꾸미는 것도 방안이 될 수 있다.

한국도로공사가 답해야 할 것들
 행담도 주민들(1980년 대)
ⓒ 이익주
 작년 3월 20여 년만에 행담도주민들이 모여 실향의 아픔을 달래고 있다.
ⓒ 당진시
주민들의 요구에 우선 답할 곳은 한국도로공사다. 한국도로공사는 국책사업으로 추진된 행담도 개발사업을 편법, 졸속, 비리 사업으로 망친 책임이 있다. 가담한 정부와 건설회사, 관련 은행도 공동의 책임이 있다. 이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이 섬에서 쫓겨난 원주민들이다.

하지만 행담도 주민들을 내쫓고 새 주인이 된 한국도로공사가 원주민들에게 내놓은 답변은 행담도 개발 당시와 다르지 않다.

도로공사는 지난해 3월 주민들이 '마을 역사관' 조성을 요구하는 민원에 "행담도는 민간기업에서 공사비를 부담해 건설하고 운영 중인 휴게소"라며 "마을역사관 건립은 한국도로공사가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행담분교
ⓒ 당진시
 행담도에서 한 아이가 행담도 앞바다를 보고 있다. (1981년)
ⓒ 이익주
도로공사는 자신들이 중심이 돼 벌인 행담도 개발사업이 비리 사업으로 드러난 지난 2005년 이후에도 행담도 원주민들에게 의례적인 사과 한마디 건넨 적이 없다. 도로공사는 행담도 갯벌 매립 과정에서 나온 생흔화석과 식물화석도 창고에 방치하고 있다.

행담도 원주민들은 '행담도, 그 섬에 우리가 살았다'고 눈물로 외치고 있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전국 각지에 행담도 출신 주민들이 살고 있지만, 꿈에서도 고향을 잊을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는 행담도 휴게소에 정작 이곳 출신인 주민들은 상처로 남은 기억 때문에 행담도 휴게소에 가지 못합니다. 행담도 휴게소 뒤편에 서해대교 건설 당시 약력이 기록된 기념비가 있고 서해대교 홍보관이 있지만, 정작 행담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의 소박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연재 '그 섬에 사람이 살았네'는 이 기사로 끝납니다. 그동안 정성스럽게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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