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판결 비상’ K-반도체]③밸류체인 전반이 특허 지뢰밭…"선제 고발로 승산 높여야"
"해외 기업들, 작은 소모품까지 독점 나서"
서울반도체, 선제 대응으로 승소 '모범 사례'
특허청, 대응전략 지원사업 대상 확대
글로벌 기업 간 반도체 ‘특허 전쟁’은 최근 대법원 판결에서도 나타났듯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동안 핵심적인 기술이나 장비 등에서 유사 여부가 특허에서 쟁점이 됐다면, 소모품까지 따지는 지금은 밸류체인 전반으로 특허 전선이 확대되는 것이다. 업계에선 면밀한 분석과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연구기관들과 단체들은 효과적인 지원책을 찾기 위해 선진국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지식재산보호원은 램리서치와 에스엠티 간 소송 등 우리 기업들이 겪고 있는 법적 분쟁을 조사한 후 지난 6월에 쓴 보고서에서 "(최근 분쟁들은) 작은 소모품까지 해외 반도체 기업들이 모든 ‘밸류체인’을 독점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고 짚었다. 이전까지 반도체 제품 하나에 국한됐던 특허 공습이 이제는 ‘밸류체인’, 즉 반도체를 만드는 과정 전역으로 확대된 현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반도체 밸류체인 곳곳이 지뢰밭
통상적으로 반도체는 넓게는 3개(설계-생산-패키징 및 테스트), 덩어리를 쪼개면 30개 이상까지 세분될 수 있다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이를 감안하면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있는 지점은 수백 개에 달한다. 하나의 지도로 펼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으로 도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각 소송도 더욱 세밀해지고 정교해져서 대응을 어렵게 하고 있다. 디자인은 물론이고 구성요소, 작동원리, 목적까지 법적다툼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특허 전쟁은 반도체 시장에서 새 기술을 놓고 늘 경쟁해야 하는 기업들로서는 반드시 돌파해야 하는 과정임은 틀림없다. 다만 최근에는 그 정도가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와 중국에 대한 미국의 각종 제재에 따른 공급망 재편 등으로 인해 더욱 격화돼 우리 기업들을 불안케 하고 있다.
반도체에 집중된 특허소송
각 산업분야의 우리 기업 전반을 살펴보면 분쟁은 반도체에 집중돼 있다. 아시아경제가 특허청에서 받은 ‘기술분야별 특허관리전문기업(NPE) 소송 통계’에서도 최근 5년간 NPE가 해외에서 우리 기업을 상대로 한 특허침해소송은 반도체 등 전기·전자 분야에 집중돼 있다. NPE는 기업 고객들로부터 특허를 관리할 권한을 일임받아서 보호하고 필요하면 분쟁에 나서는 전문기업이다. 우리 전기·전자 기업들은 2020년부터 지난 8월까지 310건 피소됐다. 기계·운송(4건), 기구·기기(35건), 가구 등 기타사업(1건)과 비교하면 그 숫자는 압도적이다. 올해 들어 반도체는 기술이 고도화하고 다양해지면서 분쟁이 필연적인 과정이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마이크로칩 성능이 2년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을 이미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 반도체의 현 시장 상황을 생각하면 반도체를 둘러싼 특허 분쟁은 앞으로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나온다.
대응 대상 넓힌 韓…"자구노력도 필요"
전문가들은 해외 기술 유출을 경계하고 분쟁이 의심되면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지난달 유럽통합특허법원(UPC)에서 독일 대형유통회사 ‘엑스퍼트 이커머스’를 상대로 승소한 서울반도체 사례가 모범적이라는 평가다. 서울반도체는 ‘엑스퍼트 이커머스’가 판매한 제품이 자사의 ‘빛 반사 및 전류 분산을 통한 광 추출 향상’ 기술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먼저 제기해서 이겼다. 특히 서울반도체는 UPC가 유럽 18개국이 연합해 개별 국가의 판결을 대신해 하나의 통합된 판결로 특허를 보호하는 법원이란 점을 주목해 이곳에 고소장을 냈다. 그 결과 이곳 판결 하나로 유럽 8개국에서 판매된 특허 침해 제품 전부에 대해 판매가 금지되고 회수 후 폐기되도록 했다. 나라별로 각각 소송했을 때 들 수 있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절감한 것이다. 면밀하게 상황을 살피고 효율적으로 짠 소송전략이 주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반도체는 특허 소송이 활발해진 2003년 이후 해외 기업들과의 약 100건의 소송에서 모두 이긴 진기록을 갖고 있다.
특허청은 올해부터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 하고 있던 ‘특허분쟁 대응전략 지원사업’을 대학과 공공연구기관으로 대상을 확대했다. 이 사업을 통해 특허청은 해외기업과의 특허 분쟁이 예상되거나 발생한 우리 기업들에 대해 분쟁상황별로 맞춤형 대응전략을 제공하고 있다. 분쟁이 길어지거나 유사한 분쟁이 동시다발로 발생한 경우에는 최대 연 4회까지 3년간 연간 2억원 수준의 금전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신청서류도 기존 10종에서 최근 4종으로 간소화됐다.
김형민 기자 khm19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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