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삼 목사의 신앙으로 세상 읽기] 탐심의 정체, 감정의 문제

2024. 11. 12.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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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로 말씀을 준비하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해 악함과 다툼의 정체가 '돈'이 아니라 '탐심'의 문제라고 말씀하신다.

다툼의 정체, 불편함의 정체, 불공평하다는 생각의 정체는 '팩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탐심의 문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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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로 말씀을 준비하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요즘 들어 교회와 교인들이 ‘우리가 믿는 믿음이 진짜 복음인가’에 대해 불안함을 느낀다. 이 불안함의 정체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우리가 배워온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 예수님의 마음과 맞는지 구별이 안 되거나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2장에는 ‘유산 문제’를 두고 예수님께 ‘공평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온다. 엉뚱하게도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예수님이 풀어 가시는 방식이 아주 흥미롭다. 비유의 시작은 한 사람의 하소연에서 시작한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눅 12:13)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으니 그 불만을 단지 유추해 볼 따름이다. 당시 중동의 풍습에 의하면 형이 많은 재산을 갖는 것이 당연하니 나눔의 공평성 문제는 아닌 듯하다. 예수님께 나온 사람의 문제는 ‘팩트’(fact·사실)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감정’에 근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비유는 유산에 대해 ‘나는 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 때문에 제기된 문제인데 예수님은 ‘유산’에 대해 거론하지 않으신다. 아니 15절에서 이렇게 엉뚱하게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유산을 물리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탐심을 물리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해 악함과 다툼의 정체가 ‘돈’이 아니라 ‘탐심’의 문제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해법이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다툼의 정체, 불편함의 정체, 불공평하다는 생각의 정체는 ‘팩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탐심의 문제라는 것이다.

요즘 젊은 목회자들을 만나거나 선교사들에게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으면 늘 그런 이야기를 한다. “여러분, 서운해하지 마세요!” 서운함의 정체는 대부분 물질에 대한 감정이다.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했지만 결국은 물질로 보상받지 못함에 대한 서운함이 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짐하던 때 물질을 보고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달라지니 억울하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자꾸 치고 올라온다. 누구와 비교하니 참 마음이 불편하다.

팩트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탐심을 물리치면 불편함도 사라진다. 탐심이 들어오면 모든 것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부자를 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큰 교회를 보면 뭔가 큰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해야 내 삶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느낌이다. 왠지 돈이 없음과 가난함이라는 사실을 ‘옳음’이라고 생각해야 이 불공평한 느낌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말씀하지 않는다. 부자가 때때로 악하게 묘사 되는 것은 돈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돈으로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동정을 받는 이유는 그 사람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잠언 22장 2절 말씀을 보자.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목회를 하면서 교회에 서운한 마음이 들 때면 내 속에 탐심이 들어오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누군가에 대한 증오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정의감도 혹시 탐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점검해 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갈라치고 증오를 일으키는 것은 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탐심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리쳐야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탐심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김병삼 만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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