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롱맨 조련사? 트럼프, 푸틴과 직접 '우크라전 담판' 시사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재선 뒤 처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을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1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스트롱맨을 잘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자부해온 트럼프가 푸틴을 상대로 직접 종전이나 휴전 협상을 타결하는 해결사로 나설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다만 러시아 측은 "대화 자체를 한 적이 없다"며 이를 부인했다.
WP에 따르면 트럼프는 지난 7일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이뤄진 푸틴과의 통화에서 유럽 대륙의 평화라는 목표를 논의했다. 트럼프는 푸틴에게 유럽에 상당 규모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우크라이나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을 확대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또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빠른 해결(resolution)'을 논의하기 위한 후속 협의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크렘린궁은 이를 공식 부인했다. 타스 통신 등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11일 WP 보도에 대해 "대화는 없었고, 전혀 사실이 아니다. 완벽한 허구"라고 말했다. "오늘날 출판되는 정보의 질을 보여주는 가장 주목할 만한 예이며, 때때로 (WP처럼)인정받는 매체에서 그러기도 한다"면서다.
다만 WP 보도 12시간이 지나도록 트럼프 측은 공개적으로 입장을 내지 않았다. 쿠르스크 탈환에 주력하는 푸틴으로서는 벌써 트럼프가 주도하는 종전 논의에 호응하는 것처럼 비치는 게 불리할 수 있다고 판단, 역공작의 일환으로 보도를 부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WP는 해당 소식을 보도하며 복수(several)의 취재원을 인용했다.
WP 보도가 사실이라면 확전에 대한 경고는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넘어 유럽 다른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동시에 이는 현상태에서의 빠른 종전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그간 트럼프는 '특정 시점에서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지를 사실상 인정하는 방향의 종전을 시사해왔다. WP 역시 "트럼프는 개인적으로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편입)를 지지하는 방향의 협상을 지지할 것이라고 암시해왔고, 푸틴과의 통화에서 영토 문제를 간략히 제기했다"고 전했다.
특히 트럼프가 직접 후속 협의에 대한 의지를 밝힌 건 본인이 푸틴과 담판을 짓는 '톱다운' 방식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주연'이 되겠다는 구상은 1기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비핵화 협상을 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결국 '노 딜'로 끝나기는 했지만, 2018~2019년 사이 트럼프가 김정은을 직접 세 차례나 만나면서 실무 협상부터 차근차근 논의를 진행하는 전통적인 '바텀 업' 방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협상이 진행된 게 사실이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역시 속도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 만큼 같은 접근법을 택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여기엔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 타결 무산으로 눈앞까지 왔다 날아간 노벨 평화상에 대한 아쉬움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장기화하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신속하게 마무리짓는다면 방법과 상관없이 그가 노벨평화상 후보 0순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기 때 노벨평화상으로 향하는 '티켓'이 김정은이었다면, 이번에는 푸틴이 될 수 있는 셈이다.
결국 우크라이나보다는 푸틴의 요구 사항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직접 주고받기식 거래를 통해 전쟁을 끝내는 게 트럼프식 해결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 트럼프는 선거 기간 중 자신이 “24시간 내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중단을 해법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트럼프의 장남인 트럼프 주니어는 10일(현지시간) 인스타그램에 "용돈이 끊길 때까지 38일 남았다"는 글을 올려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중단을 시사했다. 38일은 미국 선거인단이 차기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모이는 12월 17일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함께 올린 영상에는 달러 지폐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쏟아져 내리는 장면이 담겼다.
이런 과정에서 북·러 간 결착의 고리를 끊는 것 역시 트럼프의 구상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스트롱맨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보다는 분열시키는 편이 협상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앞서 트럼프 1기 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비서실장이었던 프레드 플라이츠 미국우선주의정책연구소(AFPI) 부소장은 "트럼프가 백악관에 복귀한다면 김정은과 푸틴을 떼어놓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7월 중앙일보 인터뷰)
정대진 원주한라대 교수는 "우크라이나 종전을 공언했던 트럼프 입장에선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며 "이를 위해 북·러 밀착 관계를 지금보다 이완시켜서 러시아가 전쟁 수행을 지속하기 어렵게 만들고 협상에 응하도록 압박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트럼프의 거래주의적 성향을 고려할 때 북한의 대러 지원이 우크라이나 전황에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할 경우 이를 차단하기 위한 협상을 러시아를 상대로 시도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는 곧 푸틴과 김정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장 푸틴은 과감한 베팅에 착수하는 분위기다.
뉴욕 타임스(NYT)는 이날 미 정부 관계자 등을 인용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군에 점령당한 쿠르스크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5만명의 병력을 소집했다고 보도했다. 여기에는 이미 전선에 배치된 북한군도 포함됐다. 한·미 당국은 1만 1000여명의 북한군이 쿠르스크에 투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당국자들은 대규모 병력의 진격이 며칠 안에 이뤄질 것으로 봤다. 북·러 연합군과 우크라이나군 사이의 본격적 교전이 임박한 것이다. 러시아는 그간 상당수 병력이 동부 전선에 매여 있는 탓에 번번이 쿠르스크의 완전 탈환에는 실패했는데, 북한군이 보강되면서 동부 전선에서 차출 없이 5만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북한도 이에 보조를 맞추면서 무기수출과 파병을 늘려 외화벌이는 물론 첨단 군사기술 이전과 같은 성과를 도출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 관영 매체들은 11일까지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 소식을 보도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정중동' 속에서 트럼프 취임 전까지 푸틴 대통령과의 밀착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김정은 입장에서 최대 관심사는 핵보유를 인정받고, 핵동결을 전제로 핵군축 회담 등을 시작하는 것"이라며 "현단계에서는 고려할 변수가 많기 때문에 신중하고 치밀하게 접근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정영교·이유정·박현주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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