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차 방송 PD, '아싸'인 덕에 볼 수 있는 풍경들
[김성호 평론가]
TV를 좀처럼 보지 않는다. 자라며 집에 TV를 두지 않은 부모님의 영향도 있을 테고, 어느 순간부터 TV가 내 인격과 지성에 해롭다고 생각하게 되면서다. 영화평론을 업으로 삼는 때문에 집에 홈시어터를 갖추어 두긴 하였으나, 꼭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프로그램을 간간이 인터넷으로 트는 걸 제외하면 가만히 앉아 방송을 보는 일은 없다 해도 좋겠다.
주변에 몇 있는 PD들이 언젠가 입봉하여 괜찮은 작품을 만들게 되면 또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종종 그들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방송가의 생리나, 또 어찌어찌 안면이 있는 어느 PD의 격을 보자면 그렇고 그런 이들이 만드는 방송을 굳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오학준의 주변 책 표지 |
ⓒ 출판공동체 편않 |
'우리의 자리'는 '출판공동체 편않'이 줄곧 펴내온 저널리즘 에세이 시리즈다. 지금껏 모두 일곱 권이 나온 가운데 처음으로 PD를 저자로 삼아 책을 펴냈다. 오학준에게 어떤 특별함이 있어 그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했을까. 그의 이야기가 이 시대에 어떤 유효함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궁금증이 이는 건 이 시리즈를 한 권도 빼지 않고 읽어온 이로써 갖는 자연스런 반응일 테다.
오학준은 12년 간 SBS 교양국에서 근무해온 이다. 시사교양 프로그램 제작부터 시작하여 편성부서를 거쳤고, 현재는 디지털 콘텐츠 제작부서에 있다고 전한다. 그는 이 책을 '실패담'이라고 말한다. '딱히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을 만들지도 못했고, 화제가 될 만한 취재를 해낸 적도 없'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책 가운데 그가 참여했다 말하는 프로그램의 이야기를 나는 일찍이 들어본 일 없었다. 그러고 보면 연예인보다 더 유명한 PD들의 이야기가 다른 세상 일인 것만 같다.
모두가 원하지만 소수의 사람들만 설 수 있는 좁은 중심에 대해선 누구나 말을 얹는다. 하지만 정작 누구도 원하지 않으나 대다수가 서 있어야 하는 주변에 대한 말은 드물다. 이곳에 대해 말하려면 자기가 중심에서 밀려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니까. 장삼이사가 되려고 사는 건 아닐 테지만, 결국 우린 대부분 장삼이사가 된다. 그런데, 장삼이사라고 입이 없겠습니까? -12p
말하자면 오학준의 글은 성공하지 못한, SBS 정규 PD로 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겐 성공에 근접한 것으로 여겨지겠으나, 다가가서 따져보자면 성공한 PD와는 삶의 궤적이 무척이나 다른 주변인의 것이다. '여러 프로그램을 메뚜기 뜀뛰듯 돌아다녔'고 '내가 저널리스트인가? 오래 갈팡질팡했'으며, 여전히 '뾰족한 답은 없'는 방송국 아웃사이더의 글, 그러나 바로 그래서 더 잘 보이는 무엇도 있는 법이다. 이 책엔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
12년 차 PD가 겪은 방송국 이모저모
들어가는 말과 감사의 말까지 모두 열일곱 편의 글은 방송국 PD로 일하며 느낀 전방위적 감상이 들어차 있다. 어찌어찌 PD로 입사한 뒤 마주한 일이 상상한 것과는 상당히 다르단 걸 깨달은 초년병 시절부터, 꼭 한 번 가고 싶었던 다큐멘터리 부서에서 제작한 프로그램과 관련한 이야기 같은 실제 경험담이 앞자리를 차지한다.
세월호 침몰참사 뒤 보도국 기자들과 팀을 이뤄 국회에서 일을 했던 경험으로부터 말 많고 탈 많은 출입처 체계를 경험한 소회를 밝히기도 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기간 동안 현지에서 보내온 영상을 편집하는 일을 맡았던 경험으로부터 방송과 축구, 늘 주인공일 수만은 없는 일의 본질에 대한 고민도 더한다.
다큐멘터리란 무언가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이 무엇이든 붙잡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야 다큐멘터리는 구체적인 실체를 지니게 된다. -65p
개중 가장 흥미로운 건 직접 만든 프로그램 이야기가 등장할 때다. 어느 날 저자와 동기 한 명을 제 사무실로 부른 CP가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어 보라고 지시한다. 모두가 한 번씩 가야 하고, 가고 나면 몸도 마음도 고생한다며 '군대'라 불렀다는 시사 프로그램이었다. 넉 달 정도 시일이 주어진 가운데, 그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다큐를 책임 지고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남들과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고 한다. 시간도, 예산도 제한적이었으나 그는 꾸준한 설득과 노력으로 진짜 원하는 방송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면접관과 면접자 사이의 확고한 권력 관계를 틀어 역지사지의 상황을 만드는 실험을 방송으로 꾸리기로 한 것이다.
사장과 취업준비생을 한 데 모아두고서 서로의 자리를 바꾼다면, 취준생들이 기업을 평가하고, 인사담당자들이 취준생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두고 경쟁하게 한다면, 한국사회의 좁은 문인 취업시장의 본질과 문제가 차츰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자기소개서를 400번 넘게 썼다는 취준생과 계약직으로 일하며 취업반수를 노리는 이, 퇴직 후 다시 백수가 된 채 더 나은 곳으로 재취업을 노리는 이까지 다양한 모습의 취준생을 섭외했다. 해마다 영업이익의 20%를 성과급으로 지급하지만 매 채용마다 채용에 목을 매고 있는 기업 상무, 급격한 성장을 이룩했지만 함께 일할 직원을 구하는 데 애를 먹는 기업 이사, 대기업 채용 시기를 피해 사람을 뽑느라 고생하는 중소기업 대표까지 기업 측 출연자까지 구했다.
방송 출연 뒤 이미지가 나빠질까 걱정하여 고사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으나 오랜 설득 끝에 뜻 있는 이들과 방송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면접이 끝나 갈 때쯤, 서로는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취업 준비생들이 처음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들이 면접 후엔 후순위로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은 복지라고 생각했던 제도가 사실은 직원들이 꺼리는 제도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회사 측 출연자도 있었다. 각자 소신을 굽히진 않았다. 하지만 서로의 거리는 한 발짝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선택을 받지 못한 한 구인 측 출연자는 그간 얼마나 직원들의 마음을 몰랐는지 안타깝다며 눈물을 보였다. 끝내 선택을 하지 않은 구직 측 출연자는 성에 차는 곳은 없었어도 회사 대표들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196p
재미 너머 의미를, 어느 PD의 끝없는 고민
책은 이처럼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며, 또 편성부서로 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시야로 방송국 전체를 바라보며, 나아가 동종업계 관계자이자 시청자로 리얼리티 프로그램 등 유행하는 방송을 보며 느낀 점을 풀어간다. 이중 어느 것은 방송사 안의 이야기를 좀처럼 들을 기회 없는 일반 독자들에게 새롭게 다가오고, 또 어느 것은 각자의 일터에서 느낄 법한 고민처럼 공감이 가기도 한다. 이렇다 할 대단한 성공담이며 취재기는 없지만, 한 명의 PD가 방송 제작 현장에서 끊임없이 고민한 결과가 빼곡히 들어찼다.
평소 영화와 책을 폭넓게 즐기는 듯, 인용된 작품 또한 적잖다. 재닛 맬컴의 <기자와 살인자>, 레모니 스니켓의 <불행한 사건의 연속>, 프란츠 카프카 <법 앞에서>, 미타니 코키의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이현주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서점>, 사사키 노리코의 <채널 고정!>,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등이다. 대학생 시절 책을 좋아해 작은 서점에서 일하기도 했다는 저자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도 한 편의 글을 뚝딱 지어 붙였다.
재미는 사람들을 쉽게 사로잡는다. 하지만 유통기한이 짧다. 그리고 사람마다 재미의 기준이 다르다. 한때 재미있었던 것이, 지금은 재미가 없다. 너에게 재미있는 것이, 나에겐 재미가 없다. 누군가에겐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게 재미있고 다른 누군가에겐 예술 작품의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게 재미있다. 일반화할 수 없는 '재미'를 핑계로 편한 길을 찾아가면, 처음엔 편해도 나중엔 부담으로 돌아온다. 이제 와서 인종 차별적 유머를 사용하던 시대의 영상을 활용할 방법이 없는 것처럼. -229p
결국 PD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다. 책 전반에 걸쳐 오학준은 일과 삶의 균형에 큰 관심을 가진 이고, 또 일을 함에 있어서도 옳고 그름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듯 보인다.
그 일환으로 요즈음 유행하는 '나는 솔로'며 '하트 시그널' 류의 짝짓기 리얼 프로그램에 대한 감상을 인상 깊게 적어두었고,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거나 방송을 위해 사실을 왜곡해 사용하는 일을 꺼리는 마음 또한 곳곳에서 드러낸다. 이를 가만히 읽다보면 PD란 직업을 수행하는데 끊임없는 고민이 자리할 밖에 없다는 생각이 고개를 치켜든다. 고민하길 포기하지 않는 사람, 중심과 주변의 구분보다는 고민하는 PD의 글로써 나는 이 책을 읽었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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