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까지 끌려가 고문 당한 끝에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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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11월 11일 박영철(朴永哲)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소위 '한일병합'에 맞서 강력하고 꾸준히 반대 하다가 일본까지 압송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후유증으로 타계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박영철은 일본 총리에게 '병합'에 반대하는 '견책서(譴責書)'를 보냈다.
이런 박영철의 행위가 한국인들에게 끼칠 영향을 우려한 통감부는 그를 일본까지 압송해 고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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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 기자]
▲ 순종의 서명 없이 만들어진 '경술국치' 조인서, 경술국치를 만들어낸 한일 주요 인물들의 기념사진 |
ⓒ 국가보훈부 |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박영철은 일본 총리에게 '병합'에 반대하는 '견책서(譴責書)'를 보냈다. "속히 한국 황제의 지위를 복위시키고, 또한 한국 황제의 호를 복위시켜 명치(明治)로 하여금 또한 천지간에 죄인이 되는 것을 면하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또 박영철은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에게도 '삼차서(三次書)'를 보냈다. 삼차서는 세 번째 보내는 청원서라는 뜻으로, 이 항의서에서 그는 강제 '병합'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일제, 박영철의 행위가 반일 감정 부추길까 우려
이런 박영철의 행위가 한국인들에게 끼칠 영향을 우려한 통감부는 그를 일본까지 압송해 고문했다. 처음에는 몽둥이로 아무 데나 무자비하게 두들겨팼다. 화롯불에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맨살을 지지기도 했다. 손톱 사이를 바늘로 찌르고, 거꾸로 매달아놓고 코에 물을 부었다.
두 팔을 뒤로 묶어놓고 그 사이에 장작을 넣어 비틀었다. 못을 박은 나무상자 안에 집어넣고는 사방으로 굴려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물이 묻은 탁자에 얹어두고 전기를 통하게 했다.
그렇게 한 것은, 다른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언감생심' 분위기를 조장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일본에 반대하다가는 어떻게 되는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악랄한 고문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멈추지 않고 반일 활동
하지만 박영철은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언행을 계속했다. 이제 일제는 그를 일본까지 끌고가지도 않고 주재소에서 그때그때 악독하게 고문했다. 그렇게 잡혀가고 풀려나기를 반복하던 중 1913년 11월 11일 그는 끝내 고문 후유증으로 숨지고 말았다.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박영철' 기사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로 끝난다. 독립유공자 대부분의 전기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답답하고 슬프다. 이런 기초적 문제는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공동체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형성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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