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판결 비상' K-반도체]①"재판매도 특허권 적용" 대법 판결 이례적…매출 절반 날린 소부장기업

김형민 2024. 11. 1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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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SMT·램리서치 특허 소송 판결서
'간접침해' 인정…법조계 "이례적"
소부장 기업들에 불리해진 판례
우리 기업 상대 해외 '특허 침공' 우려
편집자주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약하던 우리 중소기업 에스엠티(SMT)가 최근 해외 유명 반도체 장비기업 램리서치와의 특허 분쟁에서 최종 패소했다. 치열했던 법적 다툼 끝에 맛본 패배보다 더 쓰라린 건 배상액이었다. 에스엠티의 특허권 침해 사실을 인정한 대법원 제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가 판결한 손해배상액은 약 34억원. 법원에서 판결한 배상 규모는 한 해 매출의 절반과 맞먹는다. 소송비용과 지연손해금까지 더하면 부담해야 할 금액은 50억원에 근접한다. 여기에 해당 제품까지 폐기해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손해는 더욱 커진다. 에스엠티는 이 배상 판결로 존폐 갈림길에 선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와 법조계에선 이번 판결의 핵심으로 특허권의 간접 침해를 인정한 점을 꼽는다. 향후 유사한 소송에서 이 판결은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란 분석에 힘이 실린다.

에스엠티(SMT)의 패소는 우리 중소 반도체 기업들의 취약점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번 판결에선 특허의 간접침해까지 배상책임을 인정한 만큼 해외 거대 반도체 소재 및 장비기업들의 ‘특허침공’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

램리서치와 SMT 간 특허분쟁에서 문제가 됐던 SMT 스터드-소켓 어셈블리 제품. 사진=램리서치-SMT 판결문에서 발췌
SMT와의 특허분쟁에서 램리서치가 특허권을 침해받았다고 주장한 '캠 고정 클램프' 제품. 사진=램리서치-SMT 판결문에서 발췌

11일 업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우리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이례적으로 특허 간접 침해에 대해서도 배상책임을 크게 인정했다. 특허 침해 행태는 ‘직접’과 ‘간접’으로 나뉘는데, 그 이전까진 직접적인 침해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고 판결해왔다. 간접적인 침해는 그 침해 정도가 불명확한 경우가 많고, 고의성이 크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였다. 반도체 산업의 발달을 위해 침해 정도의 판단을 좁게 해야 한다는 업계의 요구도 어느 정도 반영됐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새 국면을 맞을 가능성이 생겼다. 문제가 된 제품은 SMT가 만드는 ‘스터드/소켓 어셈블리’다. 반도체 장비의 중요 부분을 고정해주는 일종의 ‘나사’와 같은 부분이다. SMT의 이 제품은 다른 회사에선 쓰지 않고 램리서치가 발명해서 생산한 ‘캠 고정 클램프’ 제품에만 쓰이고 있었다. ‘캠 고정 클램프’는 프로세스 장비에 들어가는 ‘백킹 플레이트’에서 전극 또는 다른 재료를 부착할 때 쓰이는 부품이다. 한마디로 램리서치가 만든 발명품의 ‘시그니처’ 부품을 SMT가 만들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다 2017년 2월 SMT는 ‘스터드/소켓 어셈블리’를 따로 생산해서 램리서치로부터 ‘캠 고정 클램프’를 공급받는 반도체 생산업체들에 판매했다. 회사 홈페이지에도 제품에 대한 안내를 게재하면서 해당 제품이 램리서치의 제품군에 사용된다고 홍보했다. 이에 램리서치는 SMT의 ‘스터드/소켓 어셈블리’ 따로 판매 행위는 자사의 ‘캠 고정 클램프’ 제품이 인정받은 특허를 간접적으로 침해한 것이라며 특허권침해금지 소송을 제기했다.

SMT는 자사의 판매행위가 단순히 부품을 교체하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침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반발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가 있고 그 자동차를 위해서만 만든 바퀴가 있다고 하면 해당 자동차를 구입해서 쓰는 고객들을 위해 바퀴를 만들어 따로 판매하고 교체할 수 있도록 해준 게 자동차의 특허를 간접 침해한 것은 아니지 않냐는 논리였다. 1심은 이런 SMT의 주장을 받아줬지만 2심을 맡은 특허법원과 상고심을 심리한 대법원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간접 침해’ 인정…파장에 ‘촉각’

이번 판결 이전까지 ‘간접 침해’는 분쟁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통상적으로 특허권이 한번 실시되면 그 이후에는 재판매 같은 또 다른 형태의 실시행위가 이뤄지더라도 이미 특허권은 소진됐다고 보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한 ‘특허소진이론’이 있어서였다. 보통 자사가 만든 장비들이 다른 기업의 제품에 종속된 경우가 많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중소기업들 입장에선 이 이론이 침해 분쟁에서 ‘보호막’ 구실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 대법원은 특허소진이론을 배제하고 간접 침해를 인정했다. 이 판결은 판례로 남아 앞으로 다른 법원들의 재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유사 분쟁에서 해외 장비 기업들의 입지는 세지고 우리 소부장 기업들의 목소리는 작아질 우려가 있다. 우리 기업 중에는 SMT처럼 램리서치와 같은 해외 유명 장비기업들과 ‘밸류체인’을 맺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려는 이 밸류체인에서 나온다. 앞으로 언제든지 해외 장비기업들이 이 밸류체인 속에서 간접 침해 여부를 집중적으로 따져서 특허 분쟁에 나서 우리 기업들을 어렵게 할 수 있다. 소부장 기업들은 대부분 태생적으로 보유 자금이 많지 않고 ‘맷집’도 아직 생기지 않은 중소기업들이다. 유사 분쟁에서 지면 벼랑 끝으로 몰릴 우려가 크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위기에 몰린 중소기업들을 도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미 거센 해외 기업들의 특허 공세

최근 우리 소부장 기업들을 겨냥한 해외 반도체 기업들의 분쟁 러시는 점차 거세지고 있어서 이번 판결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이 더욱 많다. 판결이 분쟁 러시에 실마리를 제공한 꼴이 된 것으로 보여서다. 우리 소부장 기업들의 기술경쟁력이 높아지면서 해외 기업들의 기술과 충돌하는 지점들이 많아졌다. 대기업들과 비교해 소부장 기업들의 대응력이 약하다는 점을 주목해 해외 기업들의 공세를 받은 타깃이 되고 있다.

한국지식재산보호원 특허분쟁대응실이 내놓은 ‘최근 5년(2018~2023)간 연도별 국내 기업 대상 특허분쟁 지원 건수 및 지원액’ 자료에 따르면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이 종사하는 제조 분야의 특허분쟁 지원 건수가 2020년 238건으로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2021년 241건으로 반등한 후 2022년 278건, 지난해 345건으로 급격히 늘었다. 지원액수도 2022년 처음으로 60억원을 넘긴 후 지난해에는 69억2919만원으로 약 70억원에 육박했다.

발명진흥회장을 맡은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외국 기업들이 우리 중소기업들을 상대로 특허 소송을 많이 거는 것은 그만큼 우리 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황 회장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선 기술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고 (분쟁도) 당연한 것이어서, 지금으로선 철저히 대비하고 우리 기술을 지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 소부장 기업들을 타깃으로 삼으려는 듯, 우리나라에만 특허 실용 인증을 신청하는 해외 장비기업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특허정보검색사이트 ‘키프리스’에 따르면 램리서치는 우리나라에 신청해 인증받은 특허실용신안이 469건(인증 후 소멸된 것까지 포함)에 이른다. 미국과 유럽에는 신청한 특허가 없고 일본에는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적은 9개가 있다. 현재 램리서치는 이 특허들을 바탕으로 SMT를 포함해 우리 소부장 기업 4개를 상대로 특허 침해소송 6개를 하고 있다. 램리서치에 의해 피소된 우리 기업들에 따르면 이 소송 건수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김형민 기자 khm19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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