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성벽 쌓은 돌부터 유심히 살피면 남한산성이 세계유산 된 이유 보이죠

한은정 2024. 11. 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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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한산성이 지켜온 역사·문화적 가치를 찾아서

적을 막기 위해 흙과 돌을 이용해 높은 담을 쌓은 방어시설을 ‘성’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성의 대부분이 ‘산성’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산성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산의 정상부나 사면 등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쌓은 성을 말하죠. 국토 면적의 70%가 산인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산성이 많습니다. 조금만 찾아봐도 우리 주변에 우리 땅을 지켜온 산성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 수 있죠.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고,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산성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켜온 남한산성과 남한산성역사문화관을 방문해 역사적 가치를 되새겨보고 산성길을 걸으며 늦가을의 분위기도 느껴봤습니다.

이서준·박건희·김수민(앞에서 위쪽으로) 학생기자가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켜온 남한산성을 방문해 역사적 가치를 되새겨보고 산성길을 걸으며 늦가을의 분위기도 느껴봤다.


고조선에서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까지 산성은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해왔습니다. 전형적인 방어용 시설로 한반도의 지형을 100% 활용해 유리한 지형에서 전투하려는 지혜의 산물이죠. 산성은 평지성에 비해 방어력이 높은데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6년조에는 당나라 조정에서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쌓았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다”고 했다는 내용이 수록됐죠. 산성을 쌓는 방법은 축성 시기나 축성 주체에 따라 달랐으며, 군사적인 기능 외에 행정을 관할하는 치소성의 역할도 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
서울의 중심부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산지에 남한산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백성과 나라를 지키던 군사 요새이자 비상시에는 임시 수도, 평상시엔 읍치의 기능을 하는 계획도시였죠.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터를 활용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했어요. 7세기부터 이어져 온 축성 기술의 발달 단계를 잘 보여주는 곳으로 특히 의미가 있습니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됐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남한산성에서 늦가을의 분위기도 느껴보고, 오랜 역사를 살펴보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에 모였습니다. 길잡이가 되어줄 안명희 문화관광해설사가 반갑게 맞이했죠. “남한산성은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해 일어난 전쟁인 병자호란과 관계 깊은 곳입니다.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47일간 항전했죠. 그 역사적 현장을 둘러볼 거예요.” 남한산성은 부속 시설을 포함한 성벽 둘레가 약 12.4㎞로 5개 코스 탐방로가 있는데, 소중 학생기자단은 장수의 길로 불리는 1코스를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북문·서문·남문을 거닐며 수어장대까지 볼 수 있어 가장 사랑받는 코스라고 했죠.

남한산성의 중심 산성로터리에서 출발해 카페·식당이 모여 있는 거리를 지나 아름다운 단풍을 감상하며 400m 정도를 오르니 북문이 보입니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에요.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마는데요. 이 ‘법화골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죠. 정조 3년(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의 ‘전승문’이라 이름을 붙인 것은 그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의도였다고 해요. 선조 때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 3개의 문이 있었다고 나와 북문은 인조 2년(1624년)에 신축됐다고 추정합니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남한산성을 방문한 이서준·박건희·김수민(왼쪽부터) 학생기자가 병자호란 당시 조선 군대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북문에서 포즈를 취했다.


“북문에서는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유를 조금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요. 문 옆에 보면 돌이 되게 크죠. 그 옆쪽을 보면 돌 사이에 쐐기돌이 박혀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성벽을 쭉 보면 저 끝에는 옥수수알처럼 차곡차곡 쌓였고요. 어느 것이 더 현대에 만든 걸까요?” 안 해설사의 물음에 소중 학생기자단이 옥수수알처럼 촘촘히 쌓인 쪽을 가리켰죠. “잘 다듬어져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거꾸로예요. 7세기 말 통일신라의 산성 축성술은 성돌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은 후, 옥수수알 모양의 성돌을 촘촘히 쌓는 방식이었죠. 시간이 지나 인조 때 신라가 쌓은 성 위에 장방형으로 가공된 성돌을 평평하게 쌓는 방식으로 축성했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안명희 문화관광해설사(왼쪽에서 셋째)에게 성 위에 낮게 담을 쌓은 여장과 방어시설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다.


남한산성 보수 후 10년 뒤 일어난 병자호란에서 조선은 홍이포와 같은 신무기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이후 무너진 성벽을 새로 쌓고 남한산성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외성을 쌓죠. 3개의 외성(봉암성·한봉성·신남성)에는 크기가 큰 깬 돌과 성돌 사이에 작은 사잇돌, 쐐기돌을 섞는 축성술을 활용했어요. “청나라의 화포에 공격받고 더 튼튼한 성이 필요해 나중에는 화포 방어에 적합한 큰 돌을 쓴 겁니다. 16~18세기 신무기의 등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성을 지속해서 증·개축했죠. 무기 발달사와 동양 성곽 건축법을 연구할 수 있는 표본이 될 수 있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거예요.”

여장에는 총을 쏠 수 있도록 설치된 구멍인 총안(왼쪽·가운데)과 활을 쏘기 위한 틈인 타구(오른쪽)가 있다.


남한산성 성벽길을 걷다 보면 역사를 보여주는 또 다른 흔적이 있습니다. 성 위에 낮게 담을 쌓아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여장이라고 하죠. 여장에는 밖을 내다보며 성 외부를 향해 총을 쏠 수 있도록 설치된 구멍인 총안이 있는데요. 가운데 가까운 곳을 공격할 수 있는 근총안과 좌우에 먼 곳을 공격할 수 있는 원총안 2개를 둬 멀고 가까운 곳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죠.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기 위한 틈인 타구가 마련됐어요. 이 밖에 화포를 쏠 수 있는 시설인 포루도 갖춰 화약 무기 등장 이후의 방어시설도 잘 볼 수 있죠.

“나무가 있어서 잘 안 보이는데 저쪽 산꼭대기에 연주봉옹성이라는 게 있어요. 일반적으로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주 성곽에서 바깥쪽으로 반원이나 ㄷ형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로, 성벽에 달라붙은 적군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어 적의 공격을 막는 데 효과적이죠. 남한산성에는 총 5개의 옹성이 있는데, 병자호란 때 대포 맛을 보고 본성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거라 모두 성벽에서 길게 뻗어서 성벽을 보호합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항복하러 나간 서문에서 슬픈 역사도 되짚어보고, 한양을 지켜온 남한산성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진격은 생각보다 빨라 인조는 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어요. 준비도 없이 왔기에 물자는 부족했고 병력도 약했죠. 산성은 방어에 유리하지만 적의 포위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그만큼 풍부한 물자를 비축해 놓고 있어야 하는데요. 이때 성 안에는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밖에 없었죠. 홍이포를 앞세운 청의 거센 공격을 47일 동안 견뎌냈지만, 각지의 구원군이 남한산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패퇴하고,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결국 인조는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하게 됩니다. “서문이 인조가 항복하러 삼전도로 갈 때 나간 문이에요. 다른 이름으로는 우익문이라 하고 사대문 중 가장 작죠. 임금이 평복인 푸른 옷을 입고 정문인 남문으로 나가지 못한 것 자체가 치욕적인 일이에요.” 서문 앞에 서니, 좁은 입구를 통해 내려가는 임금의 비통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죠.

서문 전망대에서는 잠실 롯데타워도 보인다.


서문부터는 성 밖으로 펼쳐진 탁 트인 전망을 즐기며 걸을 수 있습니다. 서문 전망대에서는 잠실 롯데타워도 보였죠. 날씨가 좋은 날엔 한강과 남산까지 볼 수 있다고 해요. “저기 롯데타워 있는 곳에 석촌호수가 있죠. 거기가 400년 전 인조가 무릎을 꿇어야 했던 삼전도 자리예요.” 1637년 서울 송파구 석촌동 및 삼전동 일대에 있었던 하중도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례(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여진족의 의식)’를 하며 항복했습니다. 이 삼전도의 치욕은 삼전도비에 새겨져 지금도 석촌호수 옆에 남아있죠. 박건희 학생기자가 “삼전도의 굴욕, 오늘날의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라고 질문했어요. 안 해설사가 “슬픈 역사도 역사인 거죠. 만약 항복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조선이란 나라가 있을 수 있었을지 이런 것도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고, 역사를 바로 보고 그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어떻게 해야 할까 준비해야 하고, 슬픈 역사도 교훈을 남길 수 있다는 걸 알아야겠죠”라고 설명했습니다.

정조 3년(1779년) 약 50여 일간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사실을 알려주는 병암 남성 신수비를 살펴보는 소중 학생기자단.


정조 3년(1779년) 약 50여 일간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사실을 알려주는 병암 남성 신수비를 지나 수어장대에 도착했어요.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현재 수어장대만 남아있죠. 서쪽에 있어 본래 서장대라고 불렸고, 인조 때 단층 누각이었던 것을 영조 때 2층으로 개축하면서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고 지금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갖추게 됐어요.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수어장대에 도착한 소중 학생기자단.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현재 수어장대만 남아있다.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시해 걸어두었던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편 보호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수어장대는 2021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되었고,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 경관에 해당해요.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인조가 통과한 남문. 정조 3년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며 지화문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남한산성 사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수어장대에서 남문을 향해 성곽을 따라 내려가던 소중 학생기자단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인 암문을 발견했습니다.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고 했죠. 아름다운 단풍을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는 사람들을 보며 소중 학생기자단도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사진 촬영을 하고 걷다 보니 어느새 남문이 보였어요.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인조가 통과한 문이죠. 왕이 다니는 문답게 사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으로 현재도 출입이 가장 많아요. 정조 3년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며 지화문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사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남한산성 안에 복원된 행궁도 둘러봤습니다. 행궁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죠. 남한산성 행궁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47일간 머물렀기에 왕이 거처하며 업무를 보던 내행전에 일월오봉병이 펼쳐져 있어요. 행궁 정문에 해당하는 한남루는 2층 구조로 정조 22년(1798년)에 광주유수 홍억이 행궁의 대문이 번듯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해 세웠다고 전해지죠. “한강 이남의 남쪽의 성을 지키는 누각이라는 뜻이에요.” 한남루의 주련(기둥이나 벽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에는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항상 그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어다’ 같은 글이 적혀 있어 인상적이죠.

행궁은 도성을 떠난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홍이포를 쏘아 포환이 남한산성 행궁의 외행전(사진) 기둥을 맞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행궁 안에선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군수물자를 보관하던 곳으로 추정)를 볼 수 있었는데요. 행궁 복원을 위한 발굴과정 중 하궐마당에서 발굴됐죠. 이는 『삼국사기』에 실린 문무왕 때 주장성 축성기록과 관련 있는 것으로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발견이에요. “남한산성이 400년 전 인조 때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1300여 년 전 통일신라 시대 때 당나라를 막기 위해 태어난 주장성이 있었고 이를 활용한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죠.” 남한산성은 행궁 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단을 둔 곳인데요. 행궁 좌측에 종묘에 해당하는 좌전(左殿), 우측에 사직단에 해당하는 우실(右室)이 있죠.

임금의 정원 후원에서 담장 너머로 좌전이 보입니다. “사직은 맞은편 산기슭 아래 중턱에 아직 복원되지 않은 상태로 있어요. 조선시대 한양을 보면 경복궁이 있고 종묘사직이 있죠. 남한산성에도 행궁이 있고 종묘사직이 있죠. 이런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병자호란처럼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임시 수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역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서준 학생기자가 이외에도 남한산성이 가지는 역사적·문화적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지 궁금해했죠. “남한산성은 군사적 역할을 했었던 유산으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세계문화유산으로써 우리에게 문화적 긍지를 심어줍니다. 또 자연과 함께 관광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죠.”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산성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단풍을 구경하며 산성길을 걷는 소중 학생기자단.


남한산성역사문화관에 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의 의미와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지난 10월 31일 남한산성역사문화관이 개관했습니다. 남한산성의 우수성을 소개하는 상설전시와 남한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는 기획전을 선보이죠.

남한산성역사문화관 상설전시실에서는 남한산성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 등도 전시되어 역사적 가치와 보존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남한산성역사문화관 상설전시실에서는 남한산성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 등도 전시되어 역사적 가치와 보존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안진희 책임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먼저 기획전시실을 소개했습니다. “남한산성 하면 보통 병자호란을 떠올리시기 때문에 ‘병자호란의 기억’이라는 기획전을 꾸몄어요.” 유네스코 등재 기준 2번인 ‘인류 가치의 중요한 교류의 증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로, 총 2부로 구성됐죠. 1부 홍타이지의 조선 침략에서는 지도 맵핑 영상과 인터랙티브 자료를 통해 병자호란 발발 당시의 국제 정세와 청나라의 침략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석지형이 병자호란 당시 공조좌랑으로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겪은 일들을 기록한 『남한해위록』.


이어지는 ‘척화와 주화, 조선의 운명을 건 선택’ 부분에서는 남한산성에서 47일간 이어진 항전 당시 벌어졌던 척화론과 주화론 논쟁을 조명했어요. 바로 청나라와 강화할 것인지, 끝까지 저항할 것인지를 놓고 척화론과 주화론이 대립한 거죠. 척화파 김상헌·정온 등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강조하며 청나라와의 항전을 주장했고, 주화파 최명길은 청나라의 강력한 힘을 고려하여 화의가 현실적인 해결책이라고 주장했어요. 최명길의 『지천선생집』, 김상헌의 『청음선생문집』 등 당대 인물들의 저술과 유물을 통해 조선의 운명을 놓고 벌어진 격렬한 논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죠.

살수병의 주도검인 환도. 조선의 환도는 고려시대에 몽골의 환도에서 비롯된 칼로 외날이고 길이는 비교적 짧은 편이며 띠돈을 이용하여 허리에 패용한다.
조총은 ‘나는 새를 쏘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16세기 초 스페인에서 개발된 아퀴버스를 기원으로 한다. 조선 후기 각 군영에서는 자체적으로 조총을 제작하고 자기 부대의 ‘호’를 새겼다.
사수의 주무기인 활과 화살, 촉도리, 깍지 등도 만나볼 수 있다. 촉도리는 구부러진 화살촉을 펼 때 쓰고, 깍지는 궁수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반지로 활시위를 당길 때 손가락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한다.


2부 남한산성과 병자호란에서는 청나라 침략에 맞서 조선이 보여준 저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어요. ‘조선, 노련함으로 맞서다’에서는 병자호란 이전부터 외세 침략에 대비해 구축된 군사제도와 포수·살수·사수의 삼수병 체제 등 조선의 철저한 준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치열한 전투의 시작, 조선의 방어’ 부분에서는 조총·삼안총·별승자총통 등 다양한 화포와 함께 활과 화살 등 조선의 병사들이 사용했던 실제 무기가 전시됐어요. 화포란 화약을 활용하여 발사하는 대형 무기죠.

안진희(왼쪽) 남한산성역사문화관 책임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조선 후기 서양 대포를 모방해 만든 화포에 관해 설명했다.
조선 전기에서 중기까지 사용된 화기인 사전총통(위쪽)은 철환 형태의 발사체가 아닌 목재 화살 4발을 쏠 수 있다. 조선 전기 휴대용 화기인 소총통은 병부·약실부·통신부 등이 하나로 주조됐다.
길이가 짧은 3개의 총열을 한데 묶어서 연속 발사할 수 있는 소형화기 삼안총. 3개의 총신으로 연결돼 삼혈포라고도 한다.


상설전시실에서는 ‘인류의 공동 유산’을 주제로 한 남한산성의 탁월함과 우수성을 소개합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세계유산등재 인증서가 보였죠. 김수민 학생기자가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유는 무엇인가요”라고 물어봤습니다. “우선 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성곽 축성술이 유지·발전됐으며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서 등재 요건에 맞았고요. 무기 발달사도 읽을 수 있다는 탁월한 가치도 있죠.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예전에도 4000명이나 살았으며 읍치의 역할을 했죠. 그런 모습들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고 해서 완전성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았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화면을 터치해 산성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호패·산가지·부부합궁첩 등 소소한 민속품을 통해 그들의 삶도 엿볼 수 있었죠.

2007년 남한산성 행궁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초대형 기와를 보고 있는 소중 학생기자단.
2007년 남한산성 행궁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초대형 기와는 신라 주장성이란 기록의 증거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건 신라 주장성이란 기록의 증거가 된 2007년 남한산성 행궁지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초대형 기와입니다. “조선시대와는 다른 통일신라 시대의 기와가 나오면서 이곳이 바로 기록 속 주장성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행궁에서 건물지를 보고 실물 기와까지 보니 좀 더 실감이 났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걸었던 1코스에서 볼 수 있는 국청사처럼 남한산성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 절이 있습니다. “승려들이 남한산성 쌓는 데 큰 공력을 썼어요. 주변에 사찰을 만들어 구역을 정해 산성 관리도 했죠.” 남한산성에는 10개의 절이 있었는데, 나라를 지키고 국가를 안위하는 승영 사찰이었죠. 기거한 스님들이 축성과 성곽 관리에 힘썼기에 현재까지도 그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해요. 현재 건물이 남아있는 사찰은 개원사·장경사·망월사·국청사입니다.

남한산성역사문화관 개관을 기념하여 남한산성을 축조한 벽암대사를 그린 ‘국일도대선사 벽암존자진영’을 전시 중이다.


개관을 기념하여 특별히 남한산성을 축조한 벽암대사를 그린 ‘국일도대선사 벽암존자진영’을 전시 중이에요. 1624년 축성 이후 400년 만에 남한산성을 다시 찾은 셈입니다. “남한산성을 쌓을 때 가장 큰 역할을 했었던 스님들의 총 수장 역할을 하셨던 분이에요. 전국의 승군을 모아 성벽을 어떻게 쌓으라고 관리를 하셨죠.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것을 빌려왔는데, 6개월 동안 전시 후 다시 해인사로 돌아갈 예정이에요.”

서준 학생기자가 역사적으로 남한산성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산성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죠. 안 책임이 “도성의 남쪽은 남한산성이 지켰다면 북쪽은 북한산성이 지켰다고 볼 수 있어요. 북한산성은 지금 남한산성보다는 진입하기가 좀 힘들고 행궁 복원도 되지 않았지만 남한산성과 함께 수도를 방어하는 성곽으로 중요하죠”라고 얘기했습니다.

실감영상실에서 남한산성의 사계절을 감상하며 휴식도 취하고, 오늘 하루 남한산성의 오랜 역사를 살펴본 시간을 되짚어 봤다.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기록한 『하멜표류기』에도 남한산성이 등장합니다. 하멜은 남한산성을 왕이 유사시 피난하는 곳으로 기록하며, 약 3년 치의 식량을 비축해 놓았다고 전했죠. 1924년 네덜란드에서 출판한 『하멜표류기』, 소설 『남한산성』 초판, 이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남한산성’, 국립극단 ‘남한산성’ 공연 포스터 등 남한산성을 다룬 작품도 볼 수 있었습니다.

남한산성역사문화관 상설전시실에서는 남한산성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 등도 전시되어 역사적 가치와 보존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전시는 남한산성이 세계유산 등재가 될 때까지 과정과 보존 관리 방안을 안내하며 마무리됐죠. 서적·무기류·토기류 등 유물 800여 점이 보관된 지하 보이는 수장고도 유리 스크린을 통해 살펴보고, ‘산성의 시작’ 영상도 시청한 소중 학생기자단은 마지막으로 실감영상실을 찾았어요. 남한산성의 사계절을 담은 아름다운 영상을 감상하며 오늘 하루 남한산성의 오랜 역사를 살펴본 시간을 되짚어 봤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남한산성은 어떠한 위기에도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여전히 우리의 곁에서 새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그 위대함입니다.

■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산성 나들이

「 더 추워지기 전에 늦가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산성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역사적 가치를 되새겨볼 수 있는 산성을 소개합니다.

부산 금정산성

금정산 정상부에 있는 조선시대 산성으로, 낙동강 하구와 동래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다시 쌓았어요. 조금 편하게 즐기려면 금강공원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되는데, 상부정류장에서 남문까지 완만한 흙길이라 걷기도 적당해요.

익산 미륵산성

충북 괴산군 청천면 고성리에 위치한 낙영산(해발 650.1m)과 도명산(해발 685.2m) 사이의 계곡부를 포용하여 축조한 소위 고로봉형 포곡식산성. 백제 시대 군사적 요충지로, 익산 지역 11개 성곽 중 규모가 가장 크죠. 정상에 이르면 화강암 채석장이 눈에 띄는데, 돌이 전하는 여러 이야기가 미륵산과 미륵산성에 남아 있습니다.

공주 공산성

충남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백제 웅진기의 왕성. 당시에는 웅진성이라 불렀죠. 임진왜란 이후 충청 감영(監營)이 충주에서 공주로 옮겨질 때 감영이 성내에 있었고,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기도 했어요. 산성임에도 도심에 위치해 공주 시가지 전경을 360도 볼 수 있죠.

단양 온달산성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이 신라군의 침입 때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석성입니다. 남한강이 보이는 성산의 정산 부근을 둘러싸며 축성됐고, 전체 둘레는 682m로 반월형이에요. 가파름이 심한 곳도 있으니 등산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후에 방문해 보세요.

동행취재=김수민(서울 숭의초 6)·박건희(서울 고덕초 6)·이서준(경기도 평촌초 6) 학생기자

■ 소중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이서준·박건희·김수민(앞에서 위쪽으로) 학생기자가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켜온 남한산성을 방문해 역사적 가치를 되새겨보고 산성길을 걸으며 늦가을의 분위기도 느껴봤다.

단풍이 든 어느 날, 취재를 위해 남한산성에 다녀왔어요. 남한산성 하면 병자호란이 생각났는데, 최근에 개관한 남한산성역사문화관에서 병자호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보며, 5학년 사회시간에 배운 내용도 생각났죠. 또 ‘만약 남한산성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TV나 책에서 봤던 남한산성을 실제로 보니 훨씬 더 멋있었고 특히 단풍이 핀 가을 남한산성은 너무 아름다웠어요. 이번에는 남한산성 1코스를 탐방하였는데, 다음에는 나머지 코스도 탐방해보고 싶었어요. 소중 독자 여러분들도 더 추워지기 전에 남한산성과 남한산성역사문화관에 방문하여 소중한 추억 만들어 보세요.
- 김수민(서울 숭의초 6) 학생기자

남한산성 취재 소식에 우리의 슬픈 역사가 잠든 곳으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이 걸어 힘들기도 했지만 남한산성의 성벽에 깃든 우리 조상의 지혜, 남한산성의 풍경과 수어장대와 같은 장엄한 건물들을 보니 그 힘듦도 잊을 수 있었죠. 새로 개관한 남한산성역사문화관에서 병자호란에서 우리 조상들이 썼던 무기와 책들을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우리 조상님들의 기술에 감탄했습니다. 아픔을 가지고 있는 우리 문화유산을 보니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제 최고의 취재였어요. 한국의 11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 올해가 가기 전 방문을 추천합니다!
- 박건희(서울 고덕초 6) 학생기자

역사가 자그마치 1300년이 넘는 아주 오랜 세월, 우리나라의 듬직한 산성으로서 버텨준 남한산성에 다녀왔어요. 남한산성 탐방은 1코스를 돌았는데, 여기저기에 포탄이나 화살을 쏘는 구멍이 있어서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어요. 서문에서 삼전도의 굴욕과 병자호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우리에게 아픈 역사일지 모르지만 바로 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남한산성역사문화관도 방문했는데, 전쟁 당시 사용했다는 내 키만 한 조총과 현자총통을 보고 당시 조선의 무기가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을 실감했고, 전쟁 때 이 무기들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지도 궁금해졌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보았던 것은 조총의 장전 과정이었죠. 레버를 당겨 쉽고 빠르게 장전할 수 있는 현대식 총과 다르게, 장전에 무려 몇 분이나 걸린다고 했죠. 남한산성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와 의미를 느낀 취재였어요.
- 이서준(경기도 평촌초 6) 학생기자

글=한은정 기자 han.eunjeong@joongang.co.kr,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경기문화재단·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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