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사]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신상목 2024. 11. 11.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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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더미션입니다.

포근한 11월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뒤늦게 물오른 단풍이 거리 곳곳을 장식했습니다. 가을이 익어가는 풍경을 눈과 귀와 코로 담으시고 손도 사용하셔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두셔도 좋겠습니다.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그 놀라운 경이 앞에 감탄하고 소리를 내어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무척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합니다. 이번 주는 수능 시험도 있지요. 수험생들이 가을 하늘 한번 쳐다보고 심호흡도 하면서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면 좋겠네요.

이번 주는 교회 역사 속에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날이 많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고요.

오늘자 더미션에서는 추수감사주일을 일주일 앞두고 감사의 표현을 교회 내부가 아니라 밖으로 흘려보내는 교회들을 소개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 추수감사절을 준비하십니까.

성경은 다양한 번역본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주로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 성경을 읽고 암송하며 이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어떤 분파에서는 1611년 영국에서 번역 출간된 ‘킹제임스성경(KJV)’만을 유일무이한 절대적 성경이라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다른 성경 번역본은 사탄의 성경이라고 비난한다고 하는데요. 이쯤 되면 문제가 심각해 보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원문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도 사탄의 성경이란 말인가요. KJV를 절대적으로 추앙한다면서 왜 이 영어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성경도 있을까요. 지난 토요일에는 이와 관련한 학자들의 비판적 학술대회가 있었습니다. 기사로 만나보세요.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 인도 콜카타 도착
1793년 11월 11일 영국 선교사 윌리엄 캐리가 인도 콜카타에 도착합니다. 근대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정규 교육도 받지 못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었던 캐리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겠다는 비전을 품고 선교 사역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독학으로 라틴어와 헬라어, 히브리어, 네덜란드어 등을 공부했으며 선교사로 인도에 복음을 전한 것은 물론 언어학자, 원예학자, 대학교수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습니다.

캐리는 1792년 ‘이방인 개종을 위해 수단을 사용해야 할 기독교인들의 의무에 관한 탐구’라는 긴 제목의 저서를 발간해 선교적 열정을 토로했습니다. 당시 유럽 기독교계는 영국령 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선교 문제로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영국 크리스천들이 식민지에 문명만이 아니라 사랑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식민지까지의 긴 항해를 두려워하는 예비 선교사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창조물로 쓰임 받았다는 것을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 출생
1821년 11월 11일 러시아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작품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등에는 깊은 러시아 정교 신앙이 반영됐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입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군의관이었던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모스크바 빈민 병원에서 일했으며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성격의 소지주였다고 합니다. 종교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와는 달리 잔혹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그의 작품 속 아버지들은 처음부터 부재하거나 무능하거나 잔학해 자신의 자식들을 길거리로 내몰아 몸을 팔게 하고, 자식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자녀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심지어 성적인 폭군으로 등장하거나 합니다.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그의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던 모스크바 빈민 병원이었는데 그 병원의 많은 환자들은 모두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이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때의 경험과 배움은 평생의 문학적 자산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를 졸업했지만 문학의 길을 택한 뒤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1846)로 당시 러시아 문단의 총아가 되었습니다. 러시아 비평계의 거물이던 벨린스키에게 ‘새로운 고골’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어 ‘분신’ ‘주부’ ‘백야’ ‘네트치카 네즈바노바’ 등을 집필하면서 혁명가들과 교류했습니다.

하지만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하에서는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등에 대해 토론하고 금지 서적을 읽는 것들만으로도 총살감이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1849년부터 공상적 사회주의의 경향을 띤 페트라셰프스키 모임에 출입하기 시작했고 여기서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사형은 간신히 면했으나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4년간의 감옥 생활과 또 4년간의 유형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후 그의 인간관 및 세계관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고 1840년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엔 극우 보수주의자(슬라브주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1868년 그리스도를 닮은 “긍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백치’를, 1872년 ‘악령’을, 죽기 한 해 전인 1880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발표했습니다. ‘죄와 벌’은 가난하고 약한 자의 고통과 굴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걸작이며, 만년의 미완성 대자인 ‘카라마조프의 형제’ 또한 당대 러시아 사회의 실상을 그리면서 종교와 인간의 본질을 헤집습니다.

그는 세계 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안톤 체호프,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부터 니체와 후대의 실존주의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후세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세계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의 작품을 통해 니체에서 현대의 실존주의로까지 그의 사상적 계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과 악, 성(聖)과 속(俗), 과학과 형이상학의 양극단 사이에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사상가로서 도스토옙스키는 당대에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회적, 철학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제기하고 숙고합니다.

키르케고르 별세
1855년 11월 11일 실존주의의 창시자 덴마크의 기독교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가 42세의 나이로 별세합니다. 기독교를 그리스도교 국가에 다시 소개하려고 노력했던 그는 기독교가 덴마크 동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고 어렵다고 믿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프리드리히 헤겔의 관념론과 당시 덴마크 루터교회의 무의미한 형식주의에 반대했습니다. 그 작품 중 대부분이 신앙의 본질, 교회의 제도, 기독교 윤리와 신학, 삶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개인이 직면하는 감정과 감각 같은 종교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키르케고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속하는 사르트르나 니체와 달리 ‘기독교 실존주의자’로 평가받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철학과 신학, 심리학 그리고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었기 때문에, 현대 사상에서 매우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탄생
354년 11월 13일 라틴 교부 중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고백록’과 ‘하나님의 도성’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알제리 타가스테(현재의 수크 아흐라스)에서 태어납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철학에 매료된 청년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를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때 마니교와 회의주의에 빠지기도 했던 그는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로 임명되면서 출셋길에 올랐습니다. 밀라노에서 접한 신플라톤 철학,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설교, 수도생활에 관한 증언 등을 통해 기독교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나 머리로 이해한 기독교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살아가다가 마침내 바울 서신을 ‘집어서 읽으면서’(Tolle! Lege!) 회심, 행복한 눈물 속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수직과 재산을 미련 없이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소박한 수행의 삶을 살던 그는 뜻하지 않게 히포 교구의 사제와 주교로 임명되었고 40년 가까이 사목자이자 수도승으로 살다가 석 달 남짓한 투병 끝에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백록’을 비롯한 수많은 저술과 극적이고 치열한 삶은 기독교 철학과 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칼뱅주의 5대 강령이 나온 배경
1618년 11월 13일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아르미니우스 논쟁을 논의하기 위해 도르트회의를 소집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한 당시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한 달 동안 초청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4월까지 칼뱅주의 총회에서 200명의 아르미니우스 목사가 해임됐고 15명이 체포됐으며 한 명은 반역죄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아르미니우스는 장 칼뱅과의 논쟁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선행과 하나님의 은총이 협력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네덜란드 개혁파 및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의 근간이 되는 칼뱅주의 5대 강령으로 불리는 이른바 ‘튤립(TULIP)’ 교리가 도출됐습니다.

5대 교리에는 ‘전적부패(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ence of Saints) 등으로 튤립은 영어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565년 11월 14일 유스티니아누스 로마 황제가 82세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동서 제국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재통일하고 콘스탄티노플에 여러 개의 새 교회당을 세웠으며 중세 교회법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만들었습니다.

1990년 11월 14일 영국 언론인 말콤 머거리지가 87세로 사망했습니다. 맨체스터 가디언과 펀치에서 편집장을 역임하고 수년간 BBC 해설자로 활동한 냉소적이었던 머거리지는 조용히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테레사 수녀에 대한 그의 보도는 테레사 수녀가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1630년 11월 15일 행성 운동 법칙으로 유명한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요한 케플러가 58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우주를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존재를 표현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885년 11월 15일 부간다(현재 우간다의 일부)의 통치자 므왕가가 성공회 개종자이자 왕족인 조셉 무카사를 참수합니다. 무카사는 10월 성공회 선교사 주교 제임스 해닝턴과 그의 동료들을 학살하는 데 반대했습니다. 1887년 1월까지 유혈 사태는 계속되었습니다.

1917년 11월 15일 오스왈드 챔버스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이집트 주둔 영국군 군목으로 근무하던 중 사망합니다. 그의 미망인 거트루드는 남은 생애 동안 그의 메모, 강연, 설교를 모아 베스트셀러인 ‘주님은 나의 최고봉’ 등을 엮어냈습니다.

1855년 11월 16일 스코틀랜드 선교사 겸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를 통한 첫 선교 여행 중 짐바브웨의 빅토리아 폭포를 처음 보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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