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사투리 예찬

허정원 2024. 11. 11. 00: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허정원 사회부 기자

“제주도 할머니들은 힘든 얘기를 터놓기 전에 ‘하이고 기여’라는 말을 한숨처럼 하세요. ‘그러게’, ‘네가 어찌 다 알겠어’ 혹은 ‘말도 마’라는 뜻인데요. 상대가 무거운 사연을 들을만한 사람인지 가늠하는 시간을 벌어주는 말이기도 해요.” (정신지 제주할망 전문 인터뷰 작가)

저마다의 지역 사투리를 한꺼풀 벗겨보면 그 안에 녹아 있는 이야기들에 놀랄 때가 많다. 다 안다고 생각했던 상대방의 손편지를 받고서 그간 몰랐던 마음을 새로 알게 되는 감정과 비슷한데, 그래서인지 ‘사투리의 사정’을 알고 나면 그 지역을 가본 것 이상으로 유대감이 생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9일 열린 제주올레걷기 축제. (사)제주올레는 올해 ‘꼬닥꼬닥(천천히)’하면 ‘올레’라고 답한 제주어 인사말을 도입했다. 허정원 기자

십여번 제주도를 갔지만 ‘하이고 기여’의 사정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이 말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4·3사건, 한국전쟁까지 모두 겪어내야 했던 8090 제주 할머니들의 한이 녹아있다. 생사의 경계에서 가족과 친구를 잃은 고통을 반복해서 마음에 묻어왔으니 ‘말로 다 할 수 있겠느냐’는 게 첫 번째 정서이고, 난리통에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어 말에 신중하게 된 것이 두 번째 정서다.

다른 지역에도 이유 있는 사투리가 있다. 부산 사투리 ‘맞다 아이가’는 팩트가 아닌 동질감 확인용이다. 역사적으로 외지인이 많이 드나들었던 부산은 피아와 신분의 높낮음 등을 판별하기 어려웠는데, 그래서 공감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발달했다고 한다. 같은 이유로 반말도 존댓말도 쓰기 애매했으니 자갈치 시장의 슬로건은 높임 정도가 예사로운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다.

과거 소작농이 많았던 전라도에선 생활이 힘들어 아이를 머슴살이하러 보내는 ‘담살이’라는 사투리가 남아 있고, 어려운 사람들끼리는 도울 때 쓰는 ‘손 넣어주다’는 말도 있다. 흑산도 해녀가 배를 빌려준 사람에게 줄 어획물을 따로 빼놓을 때 쓰는 ‘짓’이라는 사투리는 ‘몫’이라는 의미로 공동체 문화를 담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 때문인지 방언학자들과의 대화 주제는 방언학으로 시작해 지역 문화·정서를 거쳐 “사투리 하나가 없어지는 건 정서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쪽으로 귀결되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극단적인 수도권 지향 속에 대부분의 사투리는 소멸 수순으로 가고 있다.

사투리 보존에 고군분투 중인 건 오로지 학계와 민간단체들뿐이다. 재작년부터 지역에 투입되고 있는 지방소멸대응기금 용처에도 사투리 보존 관련은 없었다. 이 와중에 표준어를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의한 표준어 규정도 지나치게 주류 지향적이다.

로컬을 살린다며 개최하는 지역 먹거리 축제는 이제 지겹다. 막상 갔을 때 지역 정서와 이야기가 살아있지 않으면 공허할 뿐이다. 타임캡슐 격인 사투리도 마찬가지다. 지방소멸 대응은 껍데기보단 문화이고 사람이다.

허정원 사회부 기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