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인이 원하는 통역을 오래도록 하고 싶을 뿐이에요"

윤박 2024. 11. 10.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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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부터Z까지 다양한 노동이야기] 수어통역사 김보석 님

[윤박]

이제 TV 뉴스, 대형 행사 등에서 수어통역사를 마주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다양성에 대한 감각이 높아진 데 따른 변화라고 여겼는데, 정작 '노동'으로서 수어통역은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수어통역사는 어떤 일을 하고, 그 가운데 무엇을 고민하며, 어떤 어려움과 보람을 느끼고 있을까? 지난 10월 22일 수어통역사 김보석님을 만나 들어보았다.

- 수어통역사라니 좀 생소한데요,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

"정확히는 한국수어통역사입니다. 수어도 각각의 문화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나라마다, 심지어 영어권에서도 영국수어, 미국수어, 호주수어 전부 달라요. 그래서 '영어 수어', '한국어 수어' 대신 '영국수어', '한국수어'라고 부릅니다. 국제 수화가 있긴 한데, 이건 언어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호 체계예요. 간단한 안부 정도 나눌 수 있죠.

수어통역사로서 저는, 못 듣는 사람에게 통역으로 알린다기보다, 서로 언어가 다른 사람 사이에서 전달한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수어를 쓰는 사람에게 한국어를 전달하고, 한국어를 쓰는 사람에게 한국 수어를 전달하는 거죠.

또한 문화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통역을 주로 하고 있어요. 그 언어권에서 쓰이는 문화적 맥락을 주석으로 덧붙이듯이 통역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중요해요. 농인의 문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청인(聽人)의 문화에 있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거든요. 농인과 청인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청인의 문화에 있는 것을 주석처럼 달아서 통역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청인의 맥락을 주석 달아 농인에게 설명하고, 동시에 농인의 맥락을 주석 달아 청인에게 설명하는 게 저의 일이지요."

- 어떤 계기로 수어통역 일을 하시게 되었을까요?

"학부에서 수어통역학과를 졸업했고, 수어의 언어적인 접근에 관심이 많아서 대학원에 들어가서 석사를 따고 박사과정에서 언어학 공부를 하고 있어요. 더 근본적으로는 제가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 농인 부모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부모님이 농인이시고 그래서 저의 제1언어는 한국어가 아니라 한국수어예요. 제가 코다임을 먼저 말씀드리지 않는 이유는, 이것부터 말씀드리면 다들 '부모님 때문에 헌신의 마음으로 시작했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딱히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수어통역을 하게 된 건 아니에요."
 수어통역은 못 듣는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라기보다, 서로 언어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전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김보석
- 수어통역사로서 어떤 일을 하시나요?

"사실 우리나라는 수어통역사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예요. 일본은 그렇지 못하거든요. 한국에는 수어통역센터가 전국에 200개 넘게 있고, 한 곳에 적어도 3명 이상 수어통역사가 일해요. 센터의 수어 통역사는 관공서 요청으로 통역이 필요한 농인에게 통역을 합니다. 저는 농인 예술기업에서 통역사로 일하면서 프리랜서로 요청받은 통역을 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일본 농인의 공연을 통역했어요. 제가 일본어와 일본수어도 통역할 수 있거든요. 한국에서 초빙한 일본 농인 연출가가 오셔서 공연하는데, 한국 농인, 청인 관객에게 수어통역을 한 거죠. 대학교에서 일본 농인 학생에게 강의 통역을 했었고, 공연 통역도 했어요. 중간중간에 제가 반상근하는 단체 '한국농인LGBT+' 업무를 보기도 하고요.

직업으로 봤을 때 정말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워요. 생계도 큰 어려움이 없고요. 저는 본래 일본어 선생님이 꿈이었는데 수어로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죠. 또 무대에 한 번 올라 보고 싶었는데 공연 통역을 해서 무대에 서보고, 그동안 꿈꿔왔던 다양한 일들을 다 경험할 수 있거든요. 또한 멋있는 농인들과 일하고 있어서 그 점에서도 직업 만족도는 정말 높아요. 물론 단점이 없는 건 아닌데, 우선 농인이 늘 차별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차별을 계속 통역하다 보면 감정이 상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아요. 하지만 그와는 비교도 안 되게 일부 수어통역사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 다른 수어통역사가 어떻게 문제가 되나요?

"농인 복지의 일환으로 수어통역사가 배치되고 수어통역센터가 생기면서 처우가 좋아졌어요. 사실상 공무원처럼 안정되게 일할 수 있게 되었죠. 이게 독이에요. 안정적으로 일하면서 숙련을 쌓아 더 나은 통역을 하고자 하는 노력을 안 해요. 통역사는 통역해야 할 상황, 내용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가야 제대로 할 수 있어요. 직업 윤리로서 당연하다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안 그런 경우가 많죠.

정말 대충대충 통역하는 걸 왕왕 봤어요. 심지어 수요가 많으니까 수어통역사가 골라서 통역할 수 있어요. 농인이 통역에 불만을 느낀 점을 통역사에게 말하면, 통역사는 그 점을 앞으로 보완해서 통역하면 돼요. 그런데 노력하기 싫다? 적당히 월급이나 받겠다? 그러면 다음부터 그 농인, 그 단체에 통역 안 해준다는 거죠. 귀찮다는 거죠. 그래서 농인들은 불만을 말 못 해요. 누구를 위한 통역인지 모르겠어요."

- 안타까운 상황이네요.

"말씀드렸듯, 벌이가 나쁘지는 않아요. 어느 유명한 통역사는 1억을 벌었다고 자랑해요. 주변에 저를 아끼는 농인들은 '네가 대우받아야 우리가 대우받는 거야' 하시면서 저한테 왜 방송 통역 안 하냐고 하세요. 안 하는 이유는 농인이 거기에 없기 때문이에요. 농인은 TV에 안 나와요. 농인들은 아직도 공장에 있고, 안산, 구미, 파주 이런 데 살아요. 저는 차라리 공장에 채용돼서 통역하고 싶어요. 그냥 거기서 농인들이랑 같이 노는 게 좋으니까요. 진짜 목적 있는 통역을 하고 싶은 거예요. 농인의 삶은 하나도 안 나아졌는데 통역사의 삶은 계속 나아지고 있어요.

대부분의 수어통역사가 일할 때 말고는 농인을 만나지 않아요. 큰 문제입니다. 일할 때 뿐 아니라 평소 농인과 함께해야 그 문화를 익힐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수어가 더 늘 수 없어요.

이제 농인도 사회에 진출하려면 공부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통역이 안 되어서 제대로 교육이 안 되니까 사회 진출도 어려워요. 특정 분야를 열심히 공부한 통역사, 농인이 정말 원하는 통역을 하는 통역사가 너무 적어요. 농인의 세계는 각양각색으로 가득한데, 그게 수어로 표현되지 못 해요. 수어통역사가 변해야 한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도 너무 어려워요. 더욱 화가 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농사회 안에서는 청인이 소수니까, 농인들이 우리를 차별한다, 역차별받고 있다는 주장도 해요."
 한국농인LGBT+ 단체 티셔츠를 입고 나온 김보석 님.
ⓒ 윤박
- 다른 언어와 언어를 문화적 맥락으로 매개한다고 하셨는데, 속상하시겠어요.

"통역에 입력 언어와 출력 언어라는 용어가 있어요. 내가 공부한 언어가 입력됐을 때 이해할 수는 있는데, 다른 언어로는 출력하지 못하는 어휘들이 있을 수 있어요. 자신의 제 1 언어가 출력되는 통역이 가장 좋을 수밖에 없어요. 다시 말해 수어통역사의 '베스트 통역'은 음성으로 출력하는 통역이 되는 거예요. 누군가 한국어를 7만큼 하고 한국수어를 3만큼 한다면, 한국수어통역은 결코 3을 넘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실력 없는 통역사들은 음성 통역을 하라고 하면 다 도망가요. 청인 통역사가 출력 언어가 한국수어인 통역을 더 잘한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에요. 농인에게 엉터리로 통역해도 청인은 모르니까요! 농인을 무시하는 거예요."

- '한국농인LGBT+'에서 활동하시잖아요. 한국수어에 산적한 문제를 바꾸려 하신다고 들었어요.

"일단 성소수자를 나타내는 수어가 다 성행위로 표현되는 거요. 수어가 '여자와 몸을 비비는 여자', '항문 섹스하는 남자'예요. 혐오적인 표현이 엄청 많았어요. 성소수자 수어통역사는 자기혐오의 표현을 계속 써야 했어요. 저희가 나서서 쓰지 말자고 하면서 새로운 수어를 만들었어요. 기존 한국수어의 단어로 '이끌림'을 나타내서 '여성으로서 여성에게 이끌림', 이렇게 표현해요. 물론 아직도 혐오 수어를 쓰는 통역사가 많아요. 방송에서 한국어로 성소수자라고 하는데, 한국수어로 '호모'라고 통역을 하는 걸 봤어요. 청인들도 호모라고 하지 않잖아요! 만약에 농인 성소수자가 농사회에서 힘이 있으면 수어통역사들이 과연 그 수어를 써서 통역할 수 있을까 싶어요. 너무 비겁해요. 그래도 숨어 있는 농인 성소수자들이 우리가 쓰는 수어를 보고서 내 편이구나 하고 자기 안에서 확인했다는 말을 들을 때 뿌듯했죠. 무척 힘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이 사람과 일하는 게 불안하지 않겠구나 싶어 믿음이 간다고요. 이런 믿음이 수어통역사에게도 안전한 환경이 된다고 느껴요."

- 단체 티셔츠를 부러 입고 나왔다고 하셨잖아요. 로고에 어떤 뜻이 있나요?

"(반짝이는 눈빛으로) 이 로고는 수어로 무지개 퀴어라는 뜻이에요. 저희가 만든 수어예요. 기존의 한국수어로 무지개는 숫자 7를 뜻하는 수어로 반원을 그리거든요. 그런데 성소수자의 무지개는 6가지 색깔이라서 6을 뜻하는 수어로 새로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또 무지개가 우리 눈에는 반만 보일 뿐 사실은 원이래요. 그래서 '안 보이는 존재들'을 다 포함하는 퀴어라는 뜻으로 반원이 아니라 원을 그려요. 그 수어로 한국농인LGBT+의 로고를 만들었어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11월호에도 실립니다.이 글을 쓴 윤박 님은 한노보연 선전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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