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남녀가 서울 걷는 영화, 평범한데 공감 가네

김성호 2024. 11. 1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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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876] 영화 <달팽이>

[김성호 평론가]

한국영화에선 좀처럼 일상의 공간이 드러나지 않는다 느낄 때가 있다. 영화 가운데 내가 살고 거니는 일상의 공간이 소실돼 이름 모를 익명의 거리며 식당, 카페처럼 느껴질 때가 잦은 것이다. 저기 할리우드만 해도 뉴욕과 LA의 소소한 공간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작품이 적잖고, 또 유럽과 홍콩, 일본 등지의 영화도 그러한데 유독 한국의 작품에선 실재하는 장소가 표백돼 본래의 존재감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은 것이다.

혹자는 이를 문화적 열등감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탓이라 거칠게 말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오늘의 한국 관객이 영화로부터 일상을 환기하는 것보다는 비일상성을 찾는 탓이 크다고 평하기도 한다. 그 모두가 얼마쯤 영향을 미치는 것이겠으나 이따금은 영화로부터 현실의 반영을 보고자 하는 욕구를 완전히 치워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일상성을 영화 가운데 드러내려 하는 감독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88년생 젊은 감독 김태양 또한 그와 같아서, 그가 내놓은 작품 가운데선 감독이 직접 거닐고 시간을 보내었던 애정하는 장소들이 마치 생물처럼, 또는 영화의 한 주역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 달팽이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서울 도심의 일상적 풍경을 담았다

<달팽이>는 20분짜리 짤막한 단편 영화다. 한 남자와 다른 여자, 다시 그 남자와 또 다른 여자의 만남을 연속해 다뤘다. 어느 것은 우연이고 또 다른 것은 약속된 만남인데, 그 각각의 관계가 주는 독특한 감상이 보는 이에게 와서 닿는다.

만약 당신에게 일상의 공간을 영화화하라 한다면 어디를 담겠는가. 특별히 공간에 관심과 애정을 두는 시각 없이는 영화 속 공간이 매력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을 테다. 김태양이 선택한 장소는 서울 종로 일대다. 영화의 시작은 을지로3가 근처를 헤매던 한 남자의 모습으로부터다. 약속장소를 찾아가던 중인가. 그가 거리에서 한 때 알고 지냈던,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여자와 만난다. 우연한 만남부터 촉발된 소소하지만 긴장감 있는 대화들, 그로부터 다시 이어지는 분위기의 생성이며 탈락이 특별한 감상을 자아낸다.

화창한 여름날 오후, 기대치 않은 만남이다. 어색한 인사와 애매한 이야기들, 서로가 다르게 기억하는 대화가 보는 이로 하여금 과거의 관계를 생각토록 한다. 연인이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테다. 연인이 아니었다면 나누기 어려웠을 긴 시간들이 그들 사이에 깃들어 있음을 짧은 대화가 드러낸다. 몇 마디 말로 드러나는 서로의 성격과 연애 스타일, 또 현재의 감상이며 남아 있는 감정 따위가 보는 이의 관심을 자아낸다.
▲ 달팽이 스틸컷
ⓒ 영화사 진진
특별할 것 없지만, 그래서 더 공감가는

을지로3가에서 청계천로를 거쳐 종로3가에 이르는 동안 둘의 대화는 헤어진 연인 사이에 있을 법한 꼭 그러한 것이다. 이순신 동상이 이전한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단순한 화제꺼리부터, 그 칼집이 오른손에 있으니 장군이 왼손잡이라는 얘기를 과거 남자가 해줬다는 이야기, 또 못 본 새 여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거나, 그녀가 만나던 남자와 이별을 했다는 근황 따위가 연달아 오르내린다.

종로 거리에서 미술을 배운다는 남자는 여자와 함께 그곳으로 향하지만 어느 순간 서로의 갈 곳이 달라지며 예정된 이별을 맞을 뿐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여자와 그녀를 바라보는 멈춰선 남자의 모습을 끝으로 첫 커플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그저 옛 연인의 재회처럼만 보이는 영화가 특별한 감상을 자아내는 건 후반부의 이야기를 통해서다. 그는 아마도 연인처럼 보이는 이와 미리 약속된 만남을 갖는다. 이번에도 을지로3가에서 만나 시작하는 여정은 방금 전 만난 이와 걸었던 장소를 거쳤다가 종로5가까지 뻗쳐 나간다. 화창했던 날에 비가 내렸는지 주변에 촉촉하게 젖어 같은 공간이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낸다. 누가 보아도 다른 날 찍은 두 장면이지만 영화는 이 둘이 단 몇 시간, 어쩌면 단 몇 분의 시차를 두고 있는 것처럼 눙치고 넘어가는 것이다.
▲ 달팽이 스틸컷
ⓒ 영화사 진진
닮았으나 달라지는 전과 후

그로부터 전과 후의 닮았으나 전혀 다르고, 다르지만 꼭 닮아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새로운 여자와도 이순신 동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전에 걸었던 여자와 거닐며 지났던 장소들을 똑같이 지나친다. 단절된 관계와 이어지는 관계 사이의 미묘한 변화만큼 둘의 대화며 분위기도 차이가 엿보이지만, 또 을지로에서 청계천, 종로에 이르는 장소만큼 두 상황이 닮아 있기도 하다.

어느 것은 끊어졌고 어느 것은 일어나는 모습이 그저 인간에게만 엿보이는 것도 아니다. 도시의 어느 공간은 쇠락하고, 또 어느 공간은 화려하게 일어나는 모습이 서울 복판의 도심에서 역력히 엿보이는 것이다.

저기 연기하는 배우들 눈에 띄지 않는 감춰진 카메라로 찍어낸 듯한 롱테이크엔 서울의 공간과 시민들의 모습까지가 자연스레 등장한다. 직접 수차례 오간 익숙한 도시의 풍경 가운데서 감독은 지나는 사람들이며 상점 점주들에게 직접 허락을 구해 그토록 자연스런 장면을 얻어냈다 전한다.
▲ 달팽이 스틸컷
ⓒ 영화사 진진
'비포 시리즈' 한국판을 찍는다면

남녀가 제법 먼 거리를 함께 걸으며 대화한다는 구성은 멀리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의 롱테이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이 <비포 선라이즈>에선 청춘 남녀의 낭만적 데이트였으나 이후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에서 관계며 감정의 보다 복합적인 부분을 차츰 드러냈듯, <달팽이>의 그것도 그저 흔한 멜로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남녀의 풋풋하고 설레는 대화에 집중하기보다는 오늘의 대화로부터 과거 있었던 관계의 흔적을 짚어나가고 미래를 또 내다보게 하는 것이다.

또 닮은 듯 다른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칭적 관계맺음은 이 영화 속 연인을 넘어 인간과 관계, 시공간이 맺어지고 끊어지며 번성하고 쇠락하는 순환의 고리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영화의 제목인 '달팽이'와도 관계성을 지니는데, 달팽이가 이고지고 다니는 그 등껍질의 모양이 한 방향으로 돌고 도는 나선모양을 하고 있지 않던가.

그러고 보면 만나고 헤어지며 다시 또 만나고 헤어지길 바라는 우리의 관계들이나, 또 일어서고 쇠락하지만 그 안에서 다시 또 다른 순환이 거듭되는 도시와 거리의 모습들이 그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것도 같다. 크게 보면 그 순환을, 작게 보면 어느 커플이나 커플이었던 남녀의 대화를 연결해 생각하게 하는 20분짜리 단편이란 게 이 작품을 주목하게 하는 요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 안에서 서울 사람이라면 많이도 걸어보았을 도심의 풍경이 인상 깊게 등장하는 건 이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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