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은 의열단 창립일

정만진 2024. 11. 1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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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립운동가 63] 1919년 2월부터 11월 10일까지

[정만진 기자]

 (왼쪽부터) 김원봉 흉상, 황상규 흉상, 이종암 사진과 그이 동생이 저술한 <이종암 전> 표지, 김대지 흉상, 윤세주 흉상. 네 분의 흉상은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뜰에 각각 있는 것을 정만진이 찍어서 한데 합성한 것임. 이종암 지사 사진을 실은 것은 대구에 이종암 관련 현창 조형물이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임.
ⓒ 정만진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독립운동단체(제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 광복회가 일제 수사망에 걸려 해체된 1918년 2월 이후, 체포를 피해 만주로 망명한 황상규, 김대지 등 젊은 단원들은 새로운 의혈 투쟁 결사체를 조직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중국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 단체는 많은데, 대부분이 온건 노선을 견지하고 있소. 외교로 독립을 이룩하자, 실력부터 기른 다음 일제에 맞서자 등등 무기력한 주장들을 일삼고 있지요. 그래서 숫자만 많지 성과를 도출하지 못하는 게요."

"그래요. 과단하고 공격적인 폭력 투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현상은 계속될 것이외다. 뜨거운 의열 정신을 실천해야 마땅하오. 우리는 미적지근한 것은 아주 체질에 맞지 않아!"

그런 대화를 일상적으로 나누던 황상규, 김대지, 장건상, 손일민 등은 자신들보다 더 젊은 청년들을 발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23세 이종암, 22세 김상윤, 21세 김원봉과 한봉인, 19세 윤세주 등이 바로 적격의 대상자들이었다. 그 바로 위 연령에는 26세의 곽재기·서상락·윤치형 등이 있었다.

대구에서 군자금을 들고 만주로 온 이종암

황상규 등의 새로운 의열독립운동체 결성이 가능했던 것은 이종암이 출현한 덕분이었다. 대구은행에 근무하던 이종암이 거액 1만500여 원(현 시세 10억 원가량)을 들고 만주 길림으로 망명해 왔던 것이다.

이종암은1만500여 원 중 3000원은 김원봉 등에게 주어 생활비와 여비로 썼고, 7000원은 구영필에게 맡겨 삼광상회를 경영시켰다. 삼광상회에서 얻은 이익으로 의열단을 운영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종암은 나머지 돈 500여 원으로 길림성 파호문 밖 화성여관(주인은 중국인 반씨)을 세 얻었다. 이때부터 화성여관은 이종암의 거처 겸 의열단 창립 준비 모임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10여 명의 청년들이 그 집에 합숙하면서 폭탄 제조 및 사용법을 익혔다.

화성여관 전세 얻어 의열단 창립 준비에 박차

이종암은 창단 초기의 자금을 부담했을 뿐만 아니라, 김원봉과 둘이서 상해로 가 임시정부 산하 구국모험단 단원들과 3개월에 걸친 합숙훈련을 하고 돌아왔을 만큼 의열단 창단의 핵심 인물이었다.

상해에서 석 달 동안 숙식을 같이 하며 지낸 이래 이종암은 자연스레 김원봉과 남달리 친해졌고, 김원봉의 고향 벗인 김상윤과도 덩달아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이종암·김원봉·김상윤, 그리고 약간 늦게 합류한 윤세주 네 사람은 비밀결사의 공식 창단을 앞두고 의기투합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 9일 이종암의 집에서 밤샘 회합을 가졌다. 단체의 주요 정책과 활동 방향 등을 정하기 위한 토론이었다. 신생 결사체는 대표를 의백(義伯)으로 부르기로 했다.

그 무렵 장건상은 임시정부 외무차장, 김대지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황상규는 군정사 재무부장으로 있었다. 이들은 지금 맡고 있는 직무만으로도 너무 바빠 새 단체의 대표를 맡을 겨를이 없었다. 그 결과, 본인 스스로 의백 되기를 희망한 김원봉이 대표에 뽑혔다.

11월 10일 창립식 때 '공약 10조' 채택

새 단체는 창립식에서 공약 10조를 채택했다.

첫째, 천하의 정의와 관계되는 일을 맹렬히 실천한다!
둘째,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셋째,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을 확고히 한다!
넷째, 단의(團義)를 앞세우고 단원의 의(義)를 항상 우선한다!
다섯째, 의백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한다!
여섯째, 언제 어디서든 매월 한 차례씩 사정을 보고한다!
일곱째, 언제 어디서든 부르면 반드시 응해야 한다!
여덟째, 죽음을 피하지 않으며 단의에 죽는다!
아홉째, 하나가 아홉을, 아홉이 하나를 위해 헌신한다!
열째, 단의를 배반하는 자는 처단한다!

창립 단원들은 고강도 암살 파괴 운동을 벌여나가기로 결의했다. 경성을 직접 공격하되 남산 왜성대(矮星臺)의 조선 총독부, 황금정 2정목의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 태평통 1정목의 경성일보, 세 곳을 표적으로 정했다.

"총독부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짓밟기 위해 설치해 놓은 핵심 기관이니, 우리가 총독부 청사를 파괴하면 왜놈들은 심장이 멈추는 충격을 받을 것이오. 어떻게 하면 우리를 더욱 혹독하게 침탈할 것인지 동경과 서울에 앉아 그것만 궁리하고 있는 왜놈들의 중추 세력과 친일파들의 기세는 처참히 꺾일 거요."

김원봉이 그렇게 말하자 이종암이 뒤를 이었다.

"반면 우리 조선인들은 기세가 크게 왕성해질 거요. 반도의 인심을 뒤흔든 광복회도 일찍이 총독부 건물을 부수지는 못했으니 말이오."

곽재기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파괴 대상에 포함시킨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한다.

"경제 수탈의 첨병은 동척이지요. 이번에 동척 건물을 파괴하면 그 동안 땅을 빼앗기고 높은 세금에 시달려온 우리 조선 민중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할 겁니다. 반드시 완파시켜야 합니다."

이성우가 매일신보 아닌 경성일보부터 파괴 대상으로 지목한 까닭을 되짚어본다.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된 이토가 통감 시절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창간한 것이 경성일보이지요. 일어판 신문이라 왜놈들과 친일파들이 주로 구독하고 있으니 총독부와 동척을 당파하면서 함께 부수면 궤를 같이하는 의미도 각별하고요."

이렇게 11월 10일 의혈 무장 투쟁 결사체를 창립한 젊은 독립운동가들을 그날부터 즉각 활동에 들어갔다. 바로 '의열단'이었다. 정의(正義)의 義와 맹렬(猛烈)의 烈로 이름을 정한 의열단(義烈團)이었다.

"1920년대 의열 투쟁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낸 단체는 의열단이었다."(국가보훈부,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 1995)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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