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만세운동 참가 후 귀향해 상주 시위 주도

정만진 2024. 11. 1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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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립운동가 62] 11월 9일 타계한 석성기 지사

[정만진 기자]

 석성기 지사 관련 1919년 5월 3일 매일신보 보도, 상주 독립운동 기념탑
ⓒ 국가보훈부
1970년 11월 9일 석성기(石盛基)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1902년 6월 20일 경북 상주 성동리 187번지에서 출생했으니 향년 68세였다. 서울 기미독립만세 운동에 동참한 후 고향으로 내려와 시위를 주도했다가 실형 10개월을 선고받고 1년여 고문과 옥살이를 당했다.

1919년 당시 경성국어보급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시위에 뛰어들어 가슴 뜨거운 독립운동 참여를 경험한 17세 소년 석성기는 그 길로 상주로 왔다.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울 만세운동 참가 후 고향 시위 추진

고향 상주로 돌아와 보니, 서울 중동학교에 다니는 한암회, 경성보통학교 조월연도 같은 마음으로 귀향해 있었다. 이내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강용석, 성필환 등과 회동이 이루어졌다.

"온 나라가 독립만세운동 외침으로 가득차야 해! 민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궐기해서 독립의지를 온 세계에 알려야 해!"

"그렇고 말고! 법국(프랑스)에서 열리는 국제평화회의에도 대표단이 파견되었다는군. 세계 열강들이 한국인의 강인한 정신과 자세를 보고 감동을 받도록 만들어야 해!"

이들은 3월 23일 상주읍 장날에 맞춰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전국적으로 군중이 자연스레 많이 모이는 장날에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었다. 대구에서도 3월 8일 서문시장 장날에 궐기했다고 했다.

상주 장터 시위에 500여 명이나 운집

이윽고 3월 23일 오후 5시 무렵, 상주읍 장터에는 500여 명이나 되는 군중이 운집했다. 경상도 전역에서 가장 먼저 "독립만세!"를 외친 대구 서문시장 시위 참가자가 1천여 명, 경상북도에서 가장 먼저 궐기한 3월 12일 의성군 비안 시위 참가자가 200여 명이었던 데 견주면, 상주장터 500여 명은 대단한 규모였다.

사기가 충천한 지도부는 서로를 격려하면서 한암회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으로 시위를 시작했다. 군중들이 뒤따라 힘껏 고함을 연호했고, 이어서 장터를 출발해 읍내 순회 행진에 돌입했다.

방방곡곡에서 장날 독립만세 시위가 잇따르던 시기였으므로 상주장터에도 이미 일제 헌병들이 포진해 있었다. 만세소리가 터지고 군중이 행진을 벌이려 하자 헌병들이 즉각 달려와 한암회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는 곤봉과 총칼을 휘둘러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했다.

부친상 중이던 마을 청년의 호기로운 시위 독려

시위대는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전열을 다시 가다듬고 일제 헌병과 대치했다. 오후 6시 40분쯤 부친상을 치르던 중 상복을 입은 채 달려온 능암리 청년 성해식(일명 성성인)이 시장 입구 누문(樓門) 계단 위로 올라 500여 군중들을 향해 "조선이 독립된다는 소식에 만세를 부르려고 한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연달아 외쳤다.

성해식의 만세에 군중들이 다시 힘을 얻어 "독립만세!"가 장터를 우렁차게 다시 메웠다. 사람들도 자꾸 늘어났다. 당황한 일제 헌병과 경찰들이 총칼을 휘둘러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면서, 끝내 주동자 4명이 붙잡히고 말았고, 시위는 밤이 되어 끝이 났다.

끝내 총칼 앞에 시위 해산, 고문과 투옥 당해

이날 체포된 석성기는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을 때까지 한 달 이상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다시 열 달 동안 갇혀 가혹한 형벌을 받음으로써 모두 1년여 옥고를 치렀다.

아래는 1987년 10월 18일 세워진 상주 신봉동 산2-1 남산공원 소재 '항일 독립의거 기념탑'에 대한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의 '건립 취지' 안내문이다. 석성기 지사를 기리는 뜻에서 다시 한번 그 내용을 읽어본다.

1919년 3월 23일 상주군 상주장터에서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강용석과 성필환, 서울 중동학교 학생 한암회(일명 한감석), 상주공립보통학교 학생 조월연, 경성 국어보급학관 학생 석성기 등과 지역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중순부터 계획을 세우고 1919년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 상주장터에서 500여 명의 군중들과 3·1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87년 10월 18일, 상주 항일독립의거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상주 출신 독립운동가 40명의 항일투쟁의 정신을 기리고자 이 탑을 세웠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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