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지어 몽땅 싸들고 잠수정 탔다…'할머니 간첩' 무슨 일
「 〈제1부〉 ‘공화국영웅’ 남파간첩 김동식의 인생유전 」
「 6화. 독배를 든 공화국영웅 」
남파간첩 김동식은 1990년 8월 초 평양 공작지도부에 무전기로 긴급 타전했다.
" 새 포섭 대상으로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대외협력위원장으로 활동하는 손병선을 선정했으니 승인해 주기 바란다. "
손병선은 김부겸(전 국무총리, 2021년 5월~2022년 5월 재임)의 대타였다. 김부겸 포섭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돌려막기 표적이었다. 손병선은 부산대 정치학과 재학 중이던 60년 4·19 혁명 때 부산권 학생시위를 주도했던 운동권 출신이었다. 당시 50세로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에서 몸담고 있었다.
손병선은 민중당 창당을 지원하던 이선실과 친분을 쌓았다. 북한 권력 서열 22위의 거물 여간첩이란 정체를 모른 채 통일 문제에 관심 있는 독지가로 알았다. 이선실은 민중당 창당 헌금 2000만원과 500만원 상당의 대형 복사기를 기부했다. 다음은 김동식이 ‘남북 간첩전쟁 탐구’ 취재팀에 전한 간략한 포섭 과정이다.
8월 중순 어느 날, 이선실이 민중당 사무실이 있던 서울 서교동의 한 커피숍으로 손병선을 불러냈다. 안면이 있던 터라 단도직입적으로 밀어붙였다.
" 실은 나는 북한에서 파견된 노동당 정치위원이다. 북의 국가 정책을 도와주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고 손 선생의 협조를 얻고 싶다. 북한과 협력해 투쟁하자.(이선실) " 손병선은 너무도 뜻밖의 제안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 1주일간 생각할 말미를 달라.(손병선) " 1주일이 지나 이선실은 손병선을 다시 만났다. 단호한 어조로 설득했다.
" 도와주세요! 조국 통일을 위해 같이 일해 봅시다.(이선실) " " 알겠다. 열심히 노력해 보겠다.(손병선) "
며칠 후 김동식은 이선실과 함께 민중당 사무실 근처 지하 레스토랑에서 손병선과 첫 대면했다. 이선실은 손병선에게 “이분(김동식)은 평양에서 손 선생님을 도와주기 위해 파견된 노동당 연락대표”라고 소개했다. 이미 얘기를 들은 탓인지 손병선은 어색해하지 않았다. 김동식은 “나이도 어리고 부족한 것도 많으니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린다”고 인사했다. 포섭 공작은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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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선, 암호명 ‘비봉산 11호’ 부여
1차로 포섭된 ‘80년 사북항쟁’의 노동운동가 황인오와 마찬가지로, 손병선도 북한 노동당 입당식을 치렀다. 이선실과 김동식이 입회했다. “당과 수령을 위해, 조국 통일을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비봉산 11호’라는 대호(암호명)를 받았다.
이선실·황인오 대동하고 탈출하라
김동식은 손병선에게 사상·공작·통신 교육을 했다. 사상교육은 김일성의 위대성과 주체사상, 대남혁명 필요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다소 황당하지만 이런 얘기가 오갔다.
" 김일성 수령님이 나라를 광복하고 인민이 살기 좋은 지상낙원의 사회주의 체제를 세웠다. 무료교육, 무상치료, 세금 없는 나라 등이 사회주의의 강점이다. 손 선생도 아이가 태어나면 북한에 보내라. 우리가 무상으로 키워주겠다. "
공작교육은 포섭 대상 선정 기준과 방식, 지하당 조직(간첩망), 간첩망 운영에 관한 것이다. 통신교육은 무전기 작동 요령, 무전 보고, 지령 수신과 변신(암호 풀기), 접선, 무인포스트 등을 활용한 북한과의 교신 방법을 가르쳤다.
손병선은 2020년 5월 인터넷 매체인 통일뉴스에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명의로 글을 싣고 이선실과의 만남에 관해 서술했다.
" 1990년 김낙중, 이우재 등과 후배들이 민중당을 만드는 데 같이 참여하자고 하여 민중당에 들어가서 조국통일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리고 당내 원로들을 맡아 달라는 부탁에 원로들과 주 1회씩 모임을 하게 되었다. 거기서 회비도 많이 내고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선화(이선실)와 친해졌다. 그녀는 자신은 제주 출신이고 일본에 가서 살다가 한국으로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이상은 나에게 밝히지 않았는데 그녀가 북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
김동식 공작조가 황인오와 손병선 포섭을 마친 9월 말, 서울 탈출 명령이 떨어졌다.
" 10월 중순 강화도 건평리 해안으로 복귀한다. 이선실·황인오를 대동 복귀하라. "
황인오에게 평양에 방문할 뜻이 있는지 타진했다.
" 북한에 가볼 의향이 있는가?(공작조) " " 허락한다면 한번 직접 가보고 싶다.(황인오) " " 어느 정도 북한에 머물 수 있는가?(공작조) " " 일주일 정도면 괜찮다.(황인오) "
누군가 찾아간 5만 달러의 행방
탈출에 앞서 김동식 공작조는 뒤처리에 들어갔다. 돈과 무기를 처리해야 했다. 5월 26일 침투 당시 제주 서귀포 KAL호텔 근처에 있는 묘지 주변의 소나무 밑에다 단파무전기 2대와 권총 2정과 실탄, 수류탄 4발, 야간투시경 1개 등을 매몰했다. 바로 인근에는 방수 포장된 5만 달러의 공작금도 숨겨 놓았다.
황인오에게 약도를 주고 무기를 파오라고 했다. 그는 현장까지 갔는데 겁이 났던지 수거해오지 않았다. 이 무기들은 2년 후 황인오가 연루된 간첩단 사건이 터지고, 그의 진술에 따라 모두 회수됐다.
5만 달러는 90년 말 환율 710원으로 환산하면 3550만원이다. 당시 대기업 대졸 초봉이 50만원대였고, 강남 34평 아파트 시세가 1억원대 초중반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거액이다. 이 돈의 행방에 대해 김동식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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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상당산성의 무인포스트에 매몰돼 있던 벨기에산 브라우닝 권총과 실탄은 현지에서 파내 손병선에게 건네주었다. 손병선에게는 북한에 보내는 충성편지를 편지지에 자필로 작성하도록 해서 넘겨받은 뒤 “조국이 통일되면 다시 오겠다”고 작별인사를 했다.
이선실과 황인오를 대동 복귀하라는 지령이 떨어진 상태에서 인원이 늘어난 만큼 발각될 위험 부담이 커졌다. 당시 74세 노인 이선실이 행군을 하고 반잠수정을 타고 행동하는 것은 체력적으로 무리였다.
하지만 이선실은 완강했다.
“나를 할머니 취급하면 섭섭하다. 젊은 시절 수십 번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나들었다. 가다가 죽어도 좋으니 선생들(공작조)과 함께 서해를 통해 돌아가겠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물론 이선실의 배낭은 김동식이 메기로 했지만 말이다.
(계속)
그런데 배낭 안에는 브래지어가 잔뜩 있었다. 이선실은 자신이 입을 속옷 한 보따리를 챙겨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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