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분석하고 설명한다고 풀리는 게 아닙니다 [강현숙 작가의 교인 풍경-13]

우성규 2024. 11. 10.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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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설명하신 집사님
게티이미지뱅크


교회에는 성경에 대해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말씀을 죽 꿰고 있는데, 성경에 대한 지식수준이 꽤 높아 보입니다. 그것만이 아니죠. 이들은 교회 안에서 말다툼이 벌어졌을 때도 감정적으로 어느 한쪽에 휩쓸리지 않고 양쪽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정말 나무랄 데가 없고 신앙생활도 모범적으로 합니다.

얼마 전 암으로 병원에 입원한 K 집사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그토록 고통스럽다는 항암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교회 성도들이 가면 자신의 형편에 대해 너무나도 차분히 설명해줍니다. 암 진단을 받은 시점에서부터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와 더불어 현재 자신의 몸 상태, 그리고 진행될 병원 일정을 마치 자신이 환자가 아닌 의사나 보호자인 양 친절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하지만 암으로 자신의 마음이 지금 얼마나 힘든지 그런 건 말하지 않습니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그저 덤덤하게 설명할 뿐입니다.

뭔가 좀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암’이라는 진단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항암치료를 받는 중이니까 극심한 불안과 공포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눈물 한 방울 아니 울먹임도 없이 프레젠테이션하듯이 말을 하다니요.

K 집사님에게 감정은 없는 걸까요. 아니죠.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보니 너무 불안하고 그래서 자신이 그 불안이라는 감정에 묻혀버릴까 봐 자신의 감정을 대면하지 않을 뿐이죠. 그러니까 감정과 이성을 분리하여 감정은 표현하지 않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단어들을 사용해서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려 드는 것입니다.

‘주지화’라는 방어기제가 지나치면

먼저 방어기제란 살아가면서 마음의 평정이 무너져 불안함을 느낄 때 다시금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자신만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어기제 중에서 ‘주지화’란 것이 있는데, 이건 자신의 불안한 감정을 표현하기보단 이성적으로 감정을 분석하거나 설명하려 드는 것을 말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K 집사님은 항암치료를 받는 자신의 몸 상태를 감정의 동요 없이 차분히 그리고 자세히 설명하였죠. 이건 자신이 감정을 표현하면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대신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여 설명한 겁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분석하고 설명한다고 해서 풀리지 않습니다. 감정은 표현할 때 비로소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는 사그라들지요.

K 집사님은 겉보기에는 매우 침착하게 잘 대처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나아가 믿음이 좋은 사람, 아니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 깊은 사람으로 보여 부러움을 사기도 합니다. 물론 그 말도 맞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K 집사님은 ‘주지화’라는 방어기제의 사용이 지나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P 목사님도 K 집사님과 비슷한 사례입니다. P 목사님은 누가 보아도 신실한 목사님입니다. 새벽 예배드리고 운동을 한 후 집에 와서 아침 식사하고 다시 교회로 출근합니다. 그런 다음 온종일 교회에서 설교 준비며 심방, 독서 등으로 시간을 보내지요. 저녁 식사 후에도 다시 교회로 갈 때가 많습니다.

사모님이 외출 중이어도 지금은 목사님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이들도 그런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면 평소에 감정 표현이 너무 없다는 겁니다.

P 목사님이 평소에 감정 표현이 없다는 말은 목회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로 인한 부정적 감정들을 어떤 식으로든 풀어내려고 하기보다는, 이런 감정이 생겨난 이유를 이성적으로 분석하여 설명하려고 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스트레스를 받아서 생긴 감정을 영적으로 분석하고 심리학적으로 해석도 해보고 책도 읽으면서 나름 정리를 하는데, 문제는 이런 작업을 통해 머리로는 자신에 대해 잘 알지만 ‘화’나 ‘분노’ 같은 감정이 하나도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몸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죠. 인풋만 있고 아웃풋은 없으니까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느 날 P 목사님이 건강검진을 받고 결과를 보러 갔더니 의사는 큰 병원에 가서 CT 검사를 하라고 소견서를 써주었답니다. 검사결과 제거해야 할 종양과 더불어 고혈압이나 고지혈증, 그리고 당뇨 수치가 꽤 높게 나왔는데, 사모님은 목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깜짝 놀랐다고 해요.

20여 년 동안 목회하면서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얘기들을 한꺼번에 쏟아놓았기 때문입니다. 한나절을 오롯이 앉아 들었는데, 어떻게 저런 일들을 겪고도 아무 내색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는지 사모님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감정 그릇을 비워주지 않으면

감정은 분석하고 설명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을 참는 것도 모자라 흐르는 눈물조차 참느라 아예 눈을 꾹 감거나 꾸역꾸역 올라오는 울음을 삼켜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참는 것이 습관이 돼버려서 막상 슬프고 힘든 일이 생겨도 얼굴에 가면이 붙어버린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이런 모습은 ‘주지화’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데 빼내 주지 않아서 쌓인 감정은 자신도 통제를 벗어나 한꺼번에 폭발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사표를 내신 목사님이 있었는데, 참고 또 참다가 감정이 폭발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폭발하지 않으면 암이 생기거나 하는 식으로 몸 안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몸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감정을 어느 정도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무한정인 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정 그릇은 그 용량이 정해져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그 크기가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누구의 감정 그릇도 무한정이진 않습니다. 그래서 감정 그릇이 가득 찼는데도 감정을 또 담으면 감정 그릇은 흘러넘치게 됩니다. 즉 폭발하고 맙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감정은 ‘선 조절, 후 표현’입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표현하며 살아야 하는데, 감정을 표현하기 전에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익혔으면 합니다. 왜냐면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이 다짜고짜 화를 내는 것으로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을 표현한다는 걸 화풀이해도 된다는 거로 잘못 알고 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실컷 화를 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는 자신은 뒤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기 때문이죠. 물론 자신은 하고 싶은 말 다 했고 자신의 감정을 실컷 다 쏟아냈으니까 다음에 만날 때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쏟아놓은 말에 상대방은 크게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뒤끝이 없다는 건 상대방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죠. 더욱이 소리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하는 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착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조절할 필요가 있는데,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표현하기 전에 잠깐 멈추어야 합니다. 잠깐 멈추는 방법으로 가장 많이 권하는 것이 심호흡인데, 호흡은 몸과 마음을 연결해주는 것으로 호흡을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감정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불같은 마음이 누그러지고 또 긴장이 풀리는 걸 느껴본 적이 있을 겁니다. 들끓던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그래서 한 번 해보시길 권합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센 뒤에 이걸 서너 번 반복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상대방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는 ‘너’가 아닌 ‘나’를 주어로 하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너’를 주어로 말을 한다는 건 “집사님이 그렇게 말을 하니까 내가 화가 나잖아.”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똑같은 말을 ‘나’를 주어로 하면 “집사님이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니까 내가 화가 나요.”입니다.

어떠세요. ‘나’를 주어로 하면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지 상대방을 비난하는 식의 말이 되지 않으니까 최소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 겁니다.


글=강현숙 작가, 치매돌봄 전문가, ‘오십의 마음 사전’(유노책주) ‘치매지만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생명의말씀사) 저자

편집=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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