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으로 꿰뚫어보는 '정년이' 속 세 여자의 욕망
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봅니다. 그 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말>
송주연 상담심리사·작가
'人 (사람 인)'
흔히들 이 한자를 설명할 때 '두 사람이 기댄 모습을 본뜬 것' 이라 설명한다. 사람의 본질은 서로 의지하는 데 있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을 전공하고 상담심리사로 일하고 있는 지금 나는 안다. '사람인(人)'의 의미는 '서로 기대는 것'을 넘어선다.
심리학적으로 봤을 때 사람은 타인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를 알아간다. 갓 태어난 신생아는 보호자의 반응을 보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다. 이후 성인이 되어가면서, 또 성인이 된 후에도 중요한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해 간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데도 반드시 타인이 필요한 것이다. 심리적인 성장이란 이런 과정을 통해 모르거나 외면했던 자신의 모습을 알아가고 스스로를 보다 폭넓게 수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tvN 드라마 <정년이>는 이런 심리적 성장 과정을 매우 잘 보여준다. 정년(김태리), 영서(신예은), 주란(우다비) 세 인물이 서로를 비추며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살펴본다.
▲ 정년은 영서의 아픔을 알고서도 모진 말을 쏟아낸다. |
ⓒ tvN |
타고난 재능이 있지만 기본기가 부족한 정년과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영서는 여러모로 대비된다. 정년은 가진 것 없지만 밝고 허물없이 동료들을 대한다. 반면, 영서는 좋은 배경을 가졌으면서도 늘 날이 서 있다. 열심히 하고자 하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데도 정년과 영서는 서로를 자꾸만 의식한다.
그러던 중 정년은 영서와 어머니 기주(장혜진)의 대화를 듣게 된다(4,5회). "이젠 네가 내 체면을 세워줄 차례"라는 기주와 엄마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쓰지만 매번 "엄마한테 부정당하는 기분"에 힘든 영서의 속마음을 알게 된다. 영서는 수치감 속에 힘들다고 호소하지만, 정년은 모진 말을 쏟아낸다. "출발점부터 다른 네가 호강에 절은 소리를 한다"며 말이다. 나는 이 모습이 평소 정년이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과 다르게 보였다. 과도하게 화를 내는 것이 마치 자신에게 화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알고 있지만 알지 못하는' 영역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정년은 사실 무의식에서는 알고 있지만, 의식적으로는 모른 척하고 지내는 영역이 건드려진 것이다. 자신이 '타고난 재능'을 지녔고 이 역시 '다른 출발점'임을 정년이 모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어머니 공선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느끼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 일이 있고 얼마 후 정년은 자신의 어머니가 명창 채공선임을 알게 되고 혼란스러워한다. 정년은 이때 영서를 떠올리며 자신이 쏟아낸 말들이 자신에게도 해당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영서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 엄니가 옛날에 유명했던 명창이었더라. 나도 이미 넘들이랑 출발점이 달랐더라고. 너처럼 유명한 엄니를 두면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내가 막상 겪어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갑자기 나가 작게 느껴지고 비참하고 그러드라" (5회)
이 고백을 통해 정년은 영서와 자신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영서가 "엄마 덕 봤단 소리 안 들으려고 노력"(5회) 하듯, 자신 역시 그러고 싶다는 걸 깨닫는다. 정년은 이렇게 영서에게 자신을 비춰보며 스스로를 수용해간다.
▲ 정년이도 스스로 '타고난 재능'을 지녔고 이 역시 '다른 출발점'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
ⓒ tvN |
이런 영서는 '자명고' 공연으로 마침내 엄마의 인정을 받는다. 기주는 공연 후 영서를 찾아와 "잘했다, 우리 딸, 소리도, 연기도 치고(최고)였어"라고 말하며 영서를 꼭 안아준다. 하지만, 그토록 듣고 싶었던 엄마의 인정을 얻은 영서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포옹하는 엄마에게 응답하는 손도 어색할 뿐이다(7회).
왜 영서는 엄마의 인정이 기쁘지 않았을까. 이는 영서가 정년을 통해 자신의 진짜 욕망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서는 자신처럼 어머니의 그늘에 있지만, '인정'이 아닌 '나만의 길'을 갈구하는 정년을 보고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건 자기 자신만의 연기를 펼치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영서는 그토록 바랐던 어머니의 인정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을 테다. 이후 영서는 정년의 소리를 질투하면서도 정년에게 "가르쳐줘 어떻게 소리하는지"(7회)라며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에 정년은 이렇게 말해 준다.
"엄니 그늘에 가려지는 게 무섭다고 그만둘 거 아니면 난 앞만 보고 내 길을 갈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너도 앞만 보고 가. 네가 지금껏 피땀 흘려 쌓아 올린 모든 것은 오롯이 네 것이여. 앞으로도 그럴 거고."
이 말은 영서가 원하는 것을 더욱 명확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 주란과 정년은 서로의 부족한 면을 비춰주며 함께 성장해간다. |
ⓒ tvN |
'자신만의 색'을 찾는 정년은 종종 튀는 연기를 한다. 단짝 주란은 이런 정년을 비춰준다. 정년이 군졸 역으로 자신을 드러내길 고민할 때 주란은 군졸보다 큰 배역인 구슬아기를 맡았으면서도 상대역인 고미걸을 돋보이게 할 궁리를 한다. "그럼 내가 맞춰주지 뭐" 이러면서 말이다(6회). 정년은 주란의 이런 태도가 자신에게도 필요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을 쉽게 내려놓지 못해 극을 망칠뻔한 정년에게 주란은 상대역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해 준다.
"넌 니 역할도 잡아먹고 상대역도 잡아먹고 그냥 윤정년밖에 없어" (8회)
아픈 말이었지만, 한편으론 꼭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영서는 주란을 통해 완벽주의의 그림자를 거둬낸다. 주란은 완벽하지 않다고 연습마저 꺼려하는 영서에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연습하고 싶다"며 영서와는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동시에 "네가 완벽히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줄게"라며 존중해준다. 그러자 영서는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합을 맞추는 용기를 낸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색이 담긴 고미걸 캐릭터를 영서와 함께 만들어 간다(6회). 이후 영서는 주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너랑 호흡 맞추면서 깨달은 게 있어. 좋은 연기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야. 좋은 상대역을 만나서 함께 완성하는 거야" (8회)
영서는 이렇게 주란을 통해 타인에 대한 수용 또한 넓혀간다.
주란 역시 정년과 영서에게 자신을 비춰본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주란은 정년이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구슬아기'라는 큰 배역을 욕심 내 본다. 그리고 상대역인 영서에게 밀리지 않을 만큼 숨겨두었던 자신의 실력을 드러낸다. 정년과 영서를 통해 가지고 있었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능력들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정년, 영서, 주란은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고, 숨겨두었던 면모들을 드러내며 자아를 확장하고 자기 자신을 수용해 간다.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은 하지 마."
정년의 가수 데뷔를 도왔던 페트리샤(이미도)는 5회 정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이걸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드라마 속 정년, 영서, 주란이 서로를 비추면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수용해 가듯, 우리 주변에도 누군가가 우리를 비추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나를 비추고 있는 대상은 누굴까. 특별히 좋은 감정이 오가는 대상일 수도 있고, 영서와 정년처럼 날 선 감정이 오가는 상대일 수도 있다. 그런 누군가를 발견했다면 그의 어떤 부분에 내 감정이 반응하는지, 그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관찰하고 수용해 보자. 한 뼘 넓어진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선택' 을 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 <정년이>의 인물들과 함께 관계를 통해 나를 발견하는 기쁨을 느껴보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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