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살리고 구하는 사람들
남부 아프리카 에스와티니의 수도 음바바네 외곽에 에스와티니 기독의과대학(EMCU)이 있다. 에스와티니 최초이자 유일한 의과대학인데 2013년 한국인 선교사가 설립했다. 인구 120만명 가운데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HIV/AIDS) 감염 비율이 30%에 달하는 이 나라의 의료 역사에서 EMCU 설립은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의대 설립 후 학교 운영은 가시밭길이었다. 정부의 각종 행정 절차가 더뎠고 총장이 바뀌면서 대학 운영을 위한 후원이나 모금도 여의치 않았다. 2021년 ‘구원투수’가 등판했는데 캐나다의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설립자이자 총장을 지낸 양승훈 박사였다. 3대 총장으로 부임한 그의 임무는 대학을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대학교수와 총장으로 일했던 경험을 쏟아붓는 한편으로 후원 조직을 꾸리며 의대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지난 1일 그가 이메일로 보내온 ‘동역서신’에는 지난 3년의 임기를 마치는 동시에 그의 총장 연임 소식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의 편지를 받은 날 전후로 케냐와 레바논, 슬로베니아에서도 카카오톡과 이메일로 저마다의 소식이 도착했다. 며칠 내에 베트남과 요르단, 오만, 멕시코와 미얀마, 태국, 일본 등으로부터도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발신자는 모두 선교사들이다. 동역서신 내지는 선교 보고서란 이름으로 매달 날아오는 그들의 소식은 단조로운 일상을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창밖의 풍경 같다.
발칸반도 인근 슬로베니아에서 여러 해 머물고 있는 P선교사는 쉰 살도 안 됐건만 한쪽 무릎이 아파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고 했다. 동갑내기 선교사가 낯선 나라의 어느 거리를 절뚝거리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생각에 불편한 마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초·중·고 동창인 H선교사는 복음화율 2%가 안 되는 ‘선교사의 무덤’ 일본에서 3년을 거뜬히 넘겼다. 정성을 다해 교회로 이끈 현지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한국어와 한국요리를 가르치면서 누리는 사역의 기쁨이 소식지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레바논의 K선교사는 접경국 시리아의 난민촌 아이들을 모아 유소년 축구단을 꾸린 주역이다. 난민촌 아이들이 레바논 현지 아이들과 맞붙어 연승행진을 달리고 있다는 소식 대신 이번엔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 충돌로 일부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 시리아로 피란을 떠난 상황을 알려줬다. 그럼에도 축구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각오도 남겼다.
짧게는 3년, 길게는 20년 넘게 이들과 교류하면서 묘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무엇인가 구하고 살려내는 데 한 번뿐인 그들의 인생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척박한 의료 빈국에서 생명을 살려내고, 절뚝거리며 구령(救靈) 사역을 이어가는가 하면 떠돌이 난민 아이들에게 축구로 꿈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발견한 또 하나의 특징은 시니어의 힘이다. EMCU의 양 총장은 올해 69세다. 대학교수 은퇴 연령을 넘겼지만 신앙의 연륜과 경륜, 그동안 맺어 온 글로벌 네트워크, 풍부한 대학행정 경험을 쏟아부으며 말년을 불태우고 있다.
부산 금정구의 부산외국어대 캠퍼스에는 1년 전 ‘보아스 클리닉’이 들어섰다. 보건 당국으로부터 의료기관 개설 승인을 받은 부산·경남 최초의 대학 부속 의원인데 외국인 유학생 환자만 30% 정도다. 이곳의 양승봉(67) 원장은 외과 의사이자 의료선교사 출신이다. 25년 동안 네팔과 베트남에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섬긴 베테랑 사역자다. 그가 은퇴를 고심할 때 장순흥 부산외대 총장이 그를 설득해 모셔왔다. 다문화 환경에 익숙하고 의료와 선교 경험이 풍부한 인재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법정 노인 연령(현행 65세)을 75세까지 늘리자는 제안은 이 시대 어르신들에게 할 일과 일할 힘이 남아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렇다면 죽음의 영이 가득한 이 시대에 뭔가 살려내고 구하는 일에 백발의 지혜가 힘을 발휘하면 좋겠다.
박재찬 종교부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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