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부딪혀 봐야 아는 것들

2024. 11. 9.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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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맘때쯤이면 종아리를 벅벅 긁는다. 바람 든 무처럼 종아리에 탈이 나 발진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좁쌀만 했던 것이 새끼손톱만 하게 커지는데, 너무너무 가려워 살을 뜯어내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다.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가라앉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올해는 발진이 올라온 자리마다 수포가 잡혔다.

병명이라도 알고 싶어 의사에게 종아리를 내보였다. “벌레에 물리셨네.”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며 증상을 자세히 설명했지만 의사는 그런 내 말을 끊었다. “에고, 독한 놈한테 물리셨네.” 자식이 병원에 가라고 성화를 부려도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하며 치료를 거부하는 어르신들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나도 나에 대해서는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안다. 나와 함께 40년을 지냈으니 당연한 일이다. 피부가 예민해 화장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서 지내는 편이 나으며, 잔병치레가 잦은 탓에 에너지 소모가 큰 일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이따금, 이런 나의 특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을 요청받곤 한다. 분칠을 하고 사람들 앞에 서서 활기 넘치게 강연을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안다. 내가 잘 해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잘 아는 것이 있다. 내 사전에 직무유기란 있을 수 없기에 결국에는 그 일을 수락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몇 번의 강연을 했다. 강연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하품을 참느라 일그러진 입과 흘긋흘긋 시계를 보는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내가 이 일에 소질이 없다는 풍문이 퍼지길 바랐다. 그런데 저 멀리 여수까지는 나의 바람이 미처 닿지 않은 모양인지 어느 남자 중학교에서 맞춤법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서울에서 여수까지 KTX를 타도 왕복 7시간이었다.

게다가 중학생 중에서도 남자 중학생이라니. 수염 거뭇한 얼굴로 삐딱하게 앉아 흥미에도 없는 강연을 듣다가 “쌤, 이거 언제 끝나요?” 하며 저희끼리 낄낄 웃어댈 모습을 생각하니 시작도 전에 땀이 났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여수행 KTX에 실려 있었다.

천안, 익산, 남원, 구례를 지나 여수에 도착했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며 숨을 돌리는 나에게 사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이들이 여자 선생님이냐고 묻더라고요. 남자 선생님은 재미없대요.” 아이들이 그렇게 단순하냐는 나의 물음에 선생님이 쿡쿡 웃으셨다. “우리 애들은 초등학교 5학년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곧이어 수염 따위 찾아볼 수 없는 보송보송한 얼굴의 아이들이 도서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변성기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목소리가 그다지도 낭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한 번, 썰렁한 나의 농담에 배를 잡고 웃는 모습에 또 한 번, 선물로 준비한 과자를 받아 들고서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해하는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강연이 끝난 후 사서 선생님께서 나눠주신 설문지를 작성하는 아이들을 곁눈질로 훔쳐봤다. 아이들은 ‘이번 강연을 통해 얻은 것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내가 가르쳐준 맞춤법 이것저것을 써넣고 있었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짐을 정리하며 마음속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봤다.

나는 나에 대해 잘 안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 말인 즉, 그들과 내가 상호작용을 하며 만들어내는 결과는 그야말로 무한하다는 이야기다. 경험의 결과를 지레짐작하여 단정 짓는 교만은 이쯤에서 그만 부리는 것이 좋겠다. 직접 부딪혀 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쌤, 언제 또 오세요?” 아쉬운 눈망울로 내 뒤를 쫓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불러주면 또 올게!” 교문을 나서자 긴장이 풀렸는지 허기가 졌다. 여수에 오면 아귀탕을 먹겠노라 벼르고 있던 터라 식당이 모여 있는 골목으로 직행했다. 적당한 곳에 들어가 아저씨들 틈바구니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사장님, 여기 아귀탕 하나 주세요!”

그때 옆자리에서 장어탕을 드시던 할아버지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12월이나 돼야 맛있는 거야. 아귀는….” 서울에서 아귀 음식점을 골백번도 더 갔지만 이런 얘기를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하기야, 서울 촌놈들이 뭘 알겠는가. 역시 뭐든 부딪혀 봐야 안다니까.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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