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 외면한 채, 사지 내몬 푸틴
특수작전커녕 ‘총알받이’ 전락
병력 다수 무의미한 죽음맞아
우크라 자원 고갈·주의 분산 전략
러시아군은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수도 키이우를 신속히 점령해 전쟁을 조기에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하지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최고위 인사들이 키이우에 남아 항전 의지를 다지는 등 거세게 저항하면서 러시아군은 결국 키이우에서 패퇴하고 말았다. 우크라이나군은 그해 가을 대규모 반격 작전을 벌여 빼앗긴 영토의 상당 부분을 탈환했지만 러시아군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키는 데는 끝내 실패했다.
이후 전쟁의 양상은 우크라이나 동남부에서의 소모전으로 바뀌었다. 특히 고작 수십, 수백 미터를 진격하기 위해 군인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러시아군의 ‘고기 분쇄기(meat grinder)’ 전술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 전쟁 장기화로 누적된 인적 자원 손실은 러시아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을 두고 “러시아가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는 방증”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네츠크 전선의 최전방인 쿠라호베에서 우크라이나군 부중대장을 맡고 있는 안드리의 하루 일과는 새벽 3시에 시작된다. 그는 참호에서 일어나 병사들을 깨우고 잔여 탄약량을 점검한다. 약 300m 떨어진 곳에 포진한 러시아군의 야습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방어 준비를 다 마치고도 시간이 남으면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기도 한다.
전투는 러시아군의 연막탄 투척으로 시작된다. 우크라이나군 진지로 돌격하는 러시아 병사들을 연막 속에 숨기기 위해서다. 전투는 3시간가량 진행돼 해가 뜰 무렵인 새벽 6시쯤 마무리된다. 포탄 구덩이가 가득한 들판에 널브러진 러시아 병사들 시신, 파괴돼 연기를 내뿜는 군사 장비가 햇살에 비친다.
안드리는 지난달 14일 영국 더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들의 전술은 원시적”이라면서도 “그들은 끈질기다”고 말했다. 러시아군은 매일 20~30명의 전사자를 내고 있지만 조금씩이나마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군 사상자가 훨씬 많기는 하지만 우크라이나군도 인명 피해가 누적되고 있다.
안드리는 “공격에 투입되는 러시아군 병력은 정식 전투병이 아니고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다”며 “하지만 그들 때문에 탄약이 고갈되고 매일 한 명꼴로 우리 군인이 죽거나 다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목적은 우리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주의를 돌리는 것”이라며 “조잡한 전술이지만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고기 분쇄기 전술은 단순히 우크라이나군에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하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언젠가 열리게 될 종전 협상에서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려는 의도를 함께 갖고 있다. 2022년 가을 당시처럼 우크라이나군이 반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진행해 점령지를 빼앗기는 것은 러시아군에게 최악의 상황이다.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지난 6월 보고서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전략을 분석하며 “러시아군은 자신들이 끝없이 진격에 나설 역량을 갖추고 있으며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반격 작전을 좌절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가는 엄청났다. 단 하루 동안 발생하는 러시아군 사상자는 1000명을 훌쩍 넘어선다. 지난달 21일에만 1710명이 죽거나 다쳤다. 우크라이나 정부 집계에 따르면 이달 4일 기준 러시아군의 누적 사상자 수는 70만명을 넘어섰다. 우크라이나 측이 집계한 수치이지만 미국과 영국 정보 당국도 비슷한 평가를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당분간 고기 분쇄기 전술을 포기하지 않을 태세다. 사상자 대부분이 빈곤 지역 출신 병사들이어서 대도시 주민들 여론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독립 여론조사 기관 레바다센터 소장인 데니스 볼코프는 영국 가디언 인터뷰에서 “지금 전쟁터에서 싸우는 남성 대부분은 금전적 이익을 바라보고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라며 “러시아 사회 역시 그들의 죽음을 자발적 선택의 결과로 보고 차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러시아군 사이에서도 중무장한 우크라이나군 진지에 무작정 돌격하는 전술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가는 분위기다. 지뢰밭을 돌파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우크라이나군에 투항한 러시아 병사는 소셜미디어 동영상에서 “세 부대가 앞서 나갔고 이후 아무런 응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네 번째 부대였다”고 말했다. 러시아 서부 쿠르스크 지역에서 작전 중이던 제810해병여단 소속 병사들은 지난달 말 공개된 동영상에서 “적의 기관총 진지를 정면으로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16명 중에 7명이 살아 남았다. 우리는 더 이상 총알받이가 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군 병사들은 특수작전이나 후방 지원보다 일반 보병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군 입장에서 손발이 맞지 않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북한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총알받이’ 외에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이미 제기됐었다. 결국 북한군 역시 고기 분쇄기의 희생양으로 몰린 셈이다.
북한 병사들이 소모전 속에서 무의미하게 희생된다면 현대전 경험 습득이라는 목적도 달성하기 힘들어진다. 특히 짧은 기간에 파견 병력 1만여명 중 대부분이 사망 또는 부상으로 전투불능 상태에 빠진다면 북한 정권은 추가 파병을 놓고 고민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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