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역사와 해양의 역사가 엇갈린 곳, 정씨 왕조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32>]
역사의 기록과 연구는 옛날부터 국가를 중심으로 이뤄져 온 활동이다. 그런데 국가는 바다보다 육지에서 잘 발달한 제도다. 해양지역에서는 상당 수준의 문화와 질서를 갖춘 곳이라도 대륙지역에 비해 국가의 역할이 작았다. 그래서 역사의 기록도 적다.
인류 전체의 역사를 돌아보는 ‘세계사’의 구성에서 이 차이가 문제를 일으킨다. 인류의 유산 중에는 대륙지역에서 생성된 것도 있고 해양지역에서 생성된 것도 있는데, 대륙지역의 유산만 두드러지게 나타나 온 것이다.
해양지역 중 중세 이전의 역사가 가장 잘 밝혀져 있는 것은 지중해다. 이름 그대로 육지에 둘러싸인 이 바다에서는 일찍부터 육상 활동과 해상 활동이 긴밀하게 뒤얽혀 진행되었고, 근대로의 이행이 가까운 곳에서 이뤄지기 시작한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동남아 역사 연구자들은 남양을 “동방의 지중해”라 부르기도 한다. 육상-해상 활동이 뒤얽혀 펼쳐진 양상이 지중해와 비교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중해와 달리 남양의 역사는 아직도 밝혀진 것이 극히 적다.
명나라 ‘유격장군’이 된 해적 두목
남양 최초의 광역 해양국가는 7-11세기에 활발했던 스리비자야다. 14세기 말에 말라카를 세운 세력이 스리비자야의 후예를 자처한 사실에서도 그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해상제국’으로까지 불리는 스리비자야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자체 기록과 유적은 매우 적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해양국가의 일반적 특성일 수도 있다.
해양국가의 특성을 살필 만한 하나의 창문이 17세기 중국 동남해안의 ‘정(鄭)씨 왕조’다. 정지룡(鄭芝龍)-정성공(鄭成功)-정경(鄭經) 3대가 이끌며 동녕(東寧)이란 국호를 내걸기도 했던 정씨 세력은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의 한 갈래로 흔히 여겨져 왔으나 이것은 대륙의 관점일 뿐이다. 대륙의 왕조교체와 관계없이 해양국가의 성격을 가졌던 세력으로 의미가 있다.
토니오 앤드레이드와 싱 항이 엮은 〈해적, 은, 그리고 사무라이〉(2016)는 정씨 왕조의 이 성격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세계사 속에서 동아시아 바다 1550-1700”이란 넓은 부제가 붙어 있지만 16편의 수록 논문 대부분이 정씨 왕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지룡(1604?-1661)은 소년 시절 푸젠성의 집을 떠나 마카오를 거쳐 일본의 히라토(平戶)에 가서 거물 상인-해적 이단(李旦, ?-1625)의 휘하에서 일하다가 그 사업을 물려받았다. 애초에는 여러 해적집단 중 하나였는데 1628년 명나라에 귀순해 유격장군으로 임명받은 후 경쟁세력을 흡수해 제해권을 장악했다.
1628년의 “귀순”은 실제로 ‘합작’이었다. 통제력이 떨어진 데다 북방 만주족의 위협에 시달리던 명나라가 동남해역 치안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지룡을 포섭한 것이었다. 정지룡은 ‘유격장군’ 직함을 발판으로 타이완에 자리 잡은 네덜란드인과 협력하며 세력을 키웠다. 마카오 시절 습득한 포르투갈어로 네덜란드인과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단의 휘하에 있을 때부터 네덜란드인을 상대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아버지의 항복과 아들의 항전, “짜고 치는 고스톱”?
1644년 만주족의 입관(入關) 때 정지룡 일당은 반청(反淸) 세력이 의지할 중요한 군사력이 되어 있었다. 남경의 망명정부가 1645년 초 함락된 후 복주(福州)에 세워진 새 망명정부는 정지룡 세력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
이듬해 가을 청군의 진공에 대한 정지룡의 대응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정면 대결을 피하고 망명정부의 함락을 방관한 감이 있다. 그리고 곧 그 자신이 청군에 항복했다.
정지룡 항복 후 아들 정성공(1624-1662)은 항전을 계속했기 때문에 아들은 충신이었다고 하고 부자간의 충돌을 그린 기록도 있으나 상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왕조에 대한 충성은 아버지에게나 아들에게나 절대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대륙의 제국과 별개의 해양세력을 지키는 과업에 그들은 초지일관했다.
정지룡의 입장에 생각을 모아 본다. 그는 명나라와 ‘합작’으로 해양 패권을 세운 경험 위에서 청나라와 ‘합작’도 생각한 것이 아닐까? 청군의 기세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단 자신의 투항으로 청군의 예봉을 피하면서 아들이 현지의 세력을 유지해 청나라 측과 타협의 길을 찾을 기회를 만들려 한 것이 아닐까?
사료의 뒷받침이 없는 추측이다. 하지만 사료의 존재부터 논지까지 대륙과 국가 쪽으로 편향되어 있는 사실을 감안하면 해양과 비-국가 조직의 상황을 그리기 위해 적극적인 추측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 노력이 쌓이면 ‘추측’에서 ‘추론’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청나라의 체제 강화에 따른 ‘중간지대’의 소멸
정지룡은 1661년에 처형되었으나 “오십불칭요(五十不稱夭)”라는 제갈량의 말에 비춰보면 천수(天壽)를 거의 누린 셈이다. 당시 중국의 남부 지역은 삼번(三藩)이 장악한 상태였다. 청나라에 투항했다가 타협적 방식으로 남부 지역을 할거하고 있던 삼번과 비슷한 위상을 정지룡이 바라본 것이 청나라의 집권(集權)이 미흡한 상황에서는 무리한 희망이 아니었다.
정지룡 처형 직후 정성공은 타이완으로 건너갔다. 청나라와의 타협에 실패한 이제 독립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청나라와의 전선(戰線)을 줄이기 위해 본토 해안에 있던 거점을 타이완으로 옮긴 것이다. 타이완을 점거하고 있던 네덜란드인과의 협력-공생 관계를 청산하고 제해권을 독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당시 서양인의 기록에는 정성공이 ‘콕싱가(Koxinga)’란 이름으로 불렸다. ‘국성야(國姓爺)’의 음사(音寫)다. 복주 망명정부의 황제가 청년 정성공을 매우 예뻐해서 황실의 성을 하사했다는 이야기에 따른 호칭이다. 이 호칭을 정성공 세력이 열심히 선전한 것은 반청(反淸)의 명분으로 지지세력을 규합하는 전략이었다. 실제로 명나라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없었다.
정성공은 타이완 점거 직후 죽고 아들 정경(1642-1681)이 이어받았다. 정경 때의 동녕국이 남중국을 장악하고 있던 삼번, 특히 푸젠성의 경(耿)씨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는 밝혀진 것이 별로 없다. 형식상 청나라의 신하인 삼번은 공식적으로는 정씨와 적대하면서 교역 분야에서는 상당한 협력이 있었을 것을 추측할 따름이다. 삼번의 난(1673-1681) 진압 후 바로 타이완이 평정된 것을 보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말이 떠오른다.
‘충신’도 ‘개척자’도 대륙의 관점일 뿐
정씨 왕조에 관한 중국의 기록은 명나라에 대한 정지룡의 배신과 정성공의 충성에 관심이 쏠려 있고 해양세력으로서 정씨 왕조 자체의 성격은 관심 대상이 아니다. 일본인, 네덜란드인, 포르투갈인 등 외부의 기록이 새로운 실마리들을 제공한다. 〈해적, 은, 그리고 사무라이〉는 새로운 방향의 연구들을 보여준다.
레오나르 블뤼세가 1980년 푸젠사범대 초청강연에서 정지룡을 ‘매국노’로만 볼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현지 학자들이 충격을 받던 상황의 회고가 재미있다. 개혁-개방 초기로 국외 학계와의 접촉이 적을 때였다. 블뤼세는 기고 논문 “가문의 수치와 스캔들”에서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 측 기록을 통해 정씨 세력과 VOC 사이의 경쟁-협력 관계를 보여준다.
마이클 레이버는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곳”에서 17세기 동아시아 해역의 ‘중간지대’ 성격을 설명한다. 중국과 일본의 국가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교역이 급성장하는 상황, 이를 둘러싸고 중국인, 일본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집단이 경쟁을 벌이는 상황을 그린 것이다. 이 중간지대가 16세기에 크게 확장되었다가 17세기를 지나는 동안 차츰 축소되는 과정이 정씨 왕조의 성쇠에 나타난 것으로 설명한다.
정지룡은 1630년대까지 VOC를 등에 업고 세력을 일으켰다. 그가 청나라에 항복한 후 정성공은 중국인-일본인 세력을 규합해(그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VOC를 동아시아 해역에서 몰아냈다. 대륙의 왕조 관점에서는 부자간에 반대의 길로 갔지만, 해양세력의 관점에서는 사업의 연속성이 지켜진 것이다.
스리비자야 같은 순수한 해양세력에 비해 정씨 왕조는 대륙세력과 뒤얽힌 길을 걸었기 때문에 많은 기록을 남긴 것이다. 다만 그 기록 대부분이 대륙의 관점으로 각색된 것이어서 이면(裏面)을 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 명나라의 충성된 유신(遺臣)이나 타이완의 개척자로서보다 해양세계의 한 위인(偉人)으로서 정성공의 모습에서 배울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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