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했는데 버디 축하하라고? [정현권의 감성골프]
고교 친구가 스타트 하우스에서 반갑게 눈을 맞추며 아침 멘트를 날렸다. 반가움은 딱 거기까지였다.
룰(Rule) & 롤(Role) 미팅 결과 이날 플레이는 타수당 1000원 스트로크 게임으로 정해졌다. 스트로크 국룰인 △정확한 스코어 △노 터치 △디벗 그대로 △노 멀리건 △노 컨시드를 준수하기로 만장일치 합의했다.
가을이 절정에 달한 경기도 서하남 소재 캐슬렉스GC에서 친구들 사이에 아침부터 혈전이 펼쳐졌다.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지난 여름 혹독한 무더위에도 잔디 관리가 완벽했다.
청명한 가을 멀리 북한산과 우뚝 솟은 롯데월드타워를 중심에 꽂은 서울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완벽한 조건이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불리는 스트로크 방식은 순도 100% 자본주의 게임이다. 능력과 실적에 따라 한 치 빈틈 없이 자원이 배분되는 절정의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이다.
두 명 악성 훅, 한 명 OB(Out of bounds)로 출발부터 희비가 엇갈렸다. 다들 멘털을 수습하느라 필드에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린에선 1m 이내 퍼트도 속수무책이었다. 아침엔 이슬로 인해 속도가 느리다가 후반 들어 빨라지면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짧은 거리에 손을 떨고 그린에서 최악 참사인 퍼트 뒤땅도 나왔다.
컨시드(OK)를 바라는 간절한 눈길을 외면하고 모두 딴 곳을 응시했다. 한 동반자가 공을 페널티(해저드) 구역으로 날려보내곤 티잉 구역(Teeing area)에서 한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빨리 카트에 타라”는 동반자의 짧고 매몰찬 재촉에 멀리건을 바라는 그의 염원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철저하게 구제와 벌타를 구분해서 적용하니 전반에 파를 잡은 횟수가 통틀어 8개에 불과했다.
모두 30년 안팎 구력으로 여전히 동창 사이에선 고수로 통하는 그들이었다. 한 명 빼곤 전반 스코어가 모두 48타를 넘겼다.
직전에 75타로 라이프 베스트를 기록했다는 친구는 일주일 만에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 들곤 아연실색했다. 그만큼 스트로크 파괴력은 매서웠다.
파3 홀에서 에그 프라이를 연출한 동반자는 도저히 탈출 자신이 없어 2벌타를 받고 벙커 밖으로 빠져나와 결국 양파(더블파)를 범했다. 파를 기록한 동반자들에게 3명 동타에 따른 배판 적용으로 거금을 털려 벌겋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OB나 페널티(해저드) 경계 라인에서도 철저하게 벌타를 가하고 구제를 위해서도 함부로 공을 옮기지 못해 곳곳에서 곡소리가 울렸다. 상대가 버디 찬스를 잡거나 자신이 트리플 보기 위기에 처할 땐 덜컥 울렁증이 치솟았다.
모두 보기를 잡은 홀에서 활짝 웃은 장면을 빼곤 긴장의 연속이었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자동으로 배판 규정이 적용된 다음 홀에서 드라이버 그립이 경직됐다.
이날 통틀어서 버디 한 방이 유일했다. 그렇다고 버디를 축하하기엔 각자가 처한 사정이 너무 가혹했다. 웃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인지부조화라고 하는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후반 들어 점점 승부가 가려졌다. 오랜 구력을 보유한 동반자와 이 골프장을 자주 찾은 필자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둘다 최종 85타를 기록하고 다른 두 명은 93타, 94타였다. 평소 비슷한 실력이었는데 이날 스코어에 희비가 엇갈렸다.
필자는 전반 48타, 후반 37타라는 엄청난 낙차로 단연 화제였다. 30년 가까운 골프 구력에 처음 나온 기현상이다.
엄격한 룰(Rule)을 정해 철저하게 자본주의 방식으로 경쟁하고 승자들이 식사비를 책임지는 롤(Role)로 재분배를 실현해 양극화를 해소했다.
캐슬렉스 골프장은 필자와 인연이 깊다. 15년 전에 76타로 첫 라이프 베스트를 기록했고 2012년 10월2일 아웃코스 9번 홀에서 홀인원했다.
예전 동서울CC로 불리다가 조양상선이 외환위기로 파산하면서 사조산업이 인수해 2003년 리모델링으로 새로운 골프장으로 변신했다. 줄곧 골프장 입구에 물류창고가 밀집하고 진입로도 열악했는데 지금은 말끔하게 아파트 단지로 개벽했다.
“예전 그 동서울CC 맞아?” 한 동반자가 말했다. 서울 시내 어디서든 차로 30분 안팎이면 접근 가능해 강남 사모들의 놀이터로도 불린다.
스코어 분식 유혹을 물리치고 엄격하게 룰(Rule)을 지켜낸 정신 승리였다. 화려한 위장보다 고통스런 진실을 택했다. 스코어에만 중독되면 이 재미를 모른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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