훅 치고 들어온 설레임, 쿠키도 놓치지 마세요!
[조영준 기자]
▲ 영화 <청설> 스틸컷 |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01.
이야기 바깥에서 진심을 느끼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인물이나 서사가 아닌, 이를 어떻게 표현하고 쌓아 올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내는 방식과 태도를 통해서다. 대표적인 작품이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Boyhood, 2014)다. 한 소년의 성장 드라마를 담아내기 위해 12년의 세월을 쏟아붓는다는 생각 자체부터가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 외에도 영화의 안팎에서 물리적인 방식으로 진심을 담아낼 수 있는 형태는 다양하다. 의지만 있다면, 우리가 미장센이라고 부르는 연출의 모든 영역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영화 <청설>(2024)의 진심을 느끼게 된 것은 오프닝 신으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난 뒤였다. 수화로 대화를 이어가는 인물의 공백, 설정상 주어질 수 없는 대사의 여백 사이로 빼곡히 채워지는 소리가 어느 순간 느껴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울어대는 매미 소리, 아이스커피를 들이마시는 순간의 빨대 소리, 심지어 가만히 불어오는 바람 소리도. 수화를 이어가기 위해 부딪히고 마주치는 손 움직임 소리도 이 영화 속에서는 유난히 크게 들린다. BGM이 함께 흘러나오는데도 개의치 않고. 인물의 음성이 빠진 자리를 채우는 것들. 여름(노윤서 분)과 가을(김민주 분), 용준(홍경 분)이 수화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동안 공간이 허전해지지 않도록 의도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다다른 영화는 정말 그랬다. 꾸밈없고 순수하면서도 그리 복잡할 것 없지만 단정하고 예쁘고 사려 깊은.
▲ 영화 <청설> 스틸컷 |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넌 무슨 소리를 가장 듣고 싶어?"
전공은 쓸데가 없고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이력서에 써넣을 것은 하나도 준비가 되지 않은 용준은 엄마의 성화에 떠밀려 억지로 도시락 가게를 돕기로 한다. 이 일로 여름을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다. 한편, 여름은 청각 장애를 지닌 수영 선수 동생 가을의 꿈만 바라보고 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일이다. 자신의 삶은 내던져둔 채로 매일 수영장에 들러 동생의 훈련을 살피고, 남는 시간에는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와 국제 수화 수업에 매진한다. 가까워지고 싶은 용준과 내어줄 여유가 없는 여름이다.
청춘 로맨스물의 형식을 빌리고 있는 이 작품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지점의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용준에게는 꿈을 잃고 헤매는 청춘의 모습이 그려지고, 여름에게는 자신의 꿈이 아닌 타인의 목표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의 안타까움이 내재되어 있다.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름과 가을에게 주어지는 경제적인 부담은 물론, 농인으로 살아가는 인물이 경험해야 하는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 역시 그렇다. 장르의 톤에 맞춰 각각의 지점이 두드러지거나 강조되고 있지는 않지만, 정확한 현실 위에서 성실한 태도로 이야기를 쌓아내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인물 사이의 로맨스가 허구의 영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방지한다.
▲ 영화 <청설> 스틸컷 |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이 작품이 보여주는 대부분의 장면은 용준과 여름, 가을 자매가 다르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일반인인 용준이 수화를 할 수 있어서 처음부터 그 거리가 좁혀진 상태로 시작되기는 했지만, 대화를 용이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이외의 상황에는 차이가 있다. 존재 자체가 아닌 환경의 차이다(용준이 어떻게 수화를 할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엔딩크레디트 이후의 클립에서 알 수 있다). 조선호 감독은 이를 위한 장치를 여럿 마련해 둔다. 자매의 집에 달린 붉은 경광등과 등 뒤에서 다가오는 차량의 존재를 용준보다 먼저 알아차리는 여름의 예민함 같은 것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이 다르다는 점이 극 중에서 언제나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관객이 긍정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식의 장면도 활용되고 있다. 세 사람이 함께 클럽으로 향하는 장면이 여기에 속한다. 음악은 사라지고 공간의 진동만 남는 이 신의 체험을 통해 관객은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된다. 이런 방식을 다른 작품에서도 이미 활용된 바 있다. 형식은 조금 다르지만, 영화 <코다>(2021)에서도 주인공의 무대를 바라보는 농인 부모의 장면에서 음소거의 형태로 간접적인 체험이 이루어진 바 있다. 다시, 여름과 가을이 클럽 안의 스피커에 손을 대면서 다시 클럽의 음악이 선명해진다. 환하게 웃는 인물들 사이에서 마음이 먹먹해질 정도로 감동적인 장면은 막연한 이해 – 체험 – 공감의 과정을 경유하며 더 큰 울림을 준다.
▲ 영화 <청설> 스틸컷 |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내가 같이 있어야 했는데..."
용준과 여름의 떨리는 감정은 정확한 로맨스 장르의 구조에 따라 위기를 맞이한다. 두 사람의 감정이 정점을 향하는 지점에서 혼자이던 가을이 사고를 당하며 응급실에 입원하면서다. 화재로 인한 연기를 흡입한 가을은 많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후 호흡의 어려움을 겪으며 수영에 어려움을 겪는다. 바로 직전의 대회에서도 일반부에서 개인 최고 성적으로 금메달을 땄고, 앞으로 1초만 더 줄이면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갈 수 있는 시점에서 안타까운 상황을 맞이한 셈이다(여기에서도 영화는 농인과 연기, 연기와 수영의 호흡은 유기적으로 맞아떨어지며 정확한 관계성을 완성한다). 영화는 이를 시점으로 두 사람의 로맨스를 잠시 내려놓고 인물의 정체성과 관계의 균형,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공감과 이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동생만을 바라봐왔던 여름이다. 자신의 부재로 인해 가을이 사고를 당했고, 차가운 물 속에서 10년을 있었는데 선발전을 못 나가게 될까 자책하는 그의 마음. 하지만 여기에는 주변 모두의 걱정과 부담이 모습을 감춘 채로 매달려 있다. 여름의 헌신과 진심을 알기에 그동안은 하지 않았던 말과 걱정이다. 동생 가을은 어느샌가 언니의 꿈이 되어버린 자신이 짊어진 무게가 버겁게 느껴지고, 자매의 부모는 자신은 돌보지 않고 가족만 챙기려는 여름의 모습이 안쓰럽다. 사랑은 힘들 것을 미리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는 엄마의 말이 힘 있게 전해지는 까닭이다. 지금껏 여름이 자신의 삶 속에 다른 무언가를 더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으니까. 용준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서로 가늠하고 추측하며, 좋은 게 좋은 것이라 덮어놓고 지나가는 일들의 어두운 면이다. 행위 자체로만 보자면 선한 의도로 행해지는 것이기에 나쁘게 생각할 여지가 없지만,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모두를 위한 행동은 아닌 것. 통제가 가능하고 예상대로의 결과가 주어지는 상황에서는 긍정적인 면만 드러나지만, 상황이 기울기 시작하는 시점부터는 보이지 않던 단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용준이 이어플러그를 착용하고 거리를 걷고, 여름이 수영장의 물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장면은 그 거리를 좁히는 체험의 순간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모두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으로만 가늠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는 방법은 그의 삶에 직접 뛰어들어보는 일뿐이다.
05.
영화의 후반부, 서로 멀어져 있던 여름과 용준은 수영장에서 처음으로 여름이 거리를 좁혀오며 관계를 다시 이어간다. 여름이 스스로 용준의 세계로 걸어들어오는 일. 이 사건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복선 외에도 여름이 스스로 자신의 내일을 찾아갈 것이라는 암시가 담겨 있다. 물론 그 변화의 시작에는 마지막까지 여름에 대한 감정을 놓지 않고 스스로 솔직할 수 있었던 용준의 마음이 있었다.
많은 관객이 이 영화의 원작인 동명의 대만 영화 <청설>(2010)을 이미 관람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몇몇 사소한 관계 설정이 바뀐 부분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틀은 원작과 비슷하게 흘러가지만, 이 작품을 보는 내내 원작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그림자를 지워내면서 훨씬 더 사려 깊은 태도를 보여줬던 것 같다. 가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작품이 툭, 하고 마음을 치고 갈 때가 있는데, 이 작품이 꼭 그랬다. 오랜만에 만난 청춘 로맨스가 마음을 흔든다. 홍경, 노윤서, 김민주, 세 배우의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모습도 함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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