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도 푸틴도 "대화 준비 됐다"…우크라전 종전 속도 붙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로 대화 의향을 밝히며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혹은 휴전 협상에 속도가 붙을 가능성이 커지는 분위기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영토 양보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한 가운데 당사자 간 입장이 맞설 경우 전장에서는 과거 6·25 전쟁 당시 ‘고지전’과 비슷한 양상의 소모전이 벌어질 우려가 크다. 이는 곧 전선에 투입될 북한군 중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인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를 명분으로 러시아로부터 더 큰 대가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유화메시지 주고받은 트럼프-푸틴
리아노보스티,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7일(현지시간) 러시아 남부 소치에서 열린 발다이 토론클럽 본회의에서 “이 자리를 기회로 그(트럼프)에게 당선을 축하하고 싶다”고 말했다. 트럼프와 대화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는 “준비됐다”며 “언제가는 미국과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암살 시도 당시 트럼프의 대응에 대해 “용감하고 남자다웠다”고도 표현했다.
트럼프도 이날 NBC 방송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젤렌스키와의 통화사실을 밝히며 푸틴과도 “곧 통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앞서 지난 9월 대선 후보 TV 토론에서 우크라이나가 승리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이냐는 질문에 답을 피하며 “미국의 최선의 이익은 전쟁을 끝내는 것이다. 협상해야 한다”고 답했다. 지난해 5월에는 자신이 “24시간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이는 곧 이미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러시아에 편입하겠다고 주장하는 푸틴에 유리한 방향이 되더라도 신속한 종전을 추진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이와 관련, 젤렌스키는 이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유럽정치공동체(EPC) 정상회의 연설에서 “푸틴에게 굴복하고, 물러서고, 양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유럽 전체에 자살행위”라고 강조했다. 이후 기자회견에서는 “트럼프가 전쟁을 빨리 끝내기를 원한다고 믿지만, 이것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안보 보장 없는 휴전 협상은 매우 위험하다면서다.
종전이나 휴전을 위한 대화가 시작되더라도 협상이 지난하게 이어진다면 전장에선 한 뼘이라도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땅따먹기’ 식의 지리한 공방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6.25 전쟁 당시에도 1951년 5월 휴전 협상이 시작되자 남북은 주요 능선, 정상 등 고지(高地) 탈환에 사활을 걸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 당일까지도 최전방에선 휴전선의 위치와 직결되는 전투가 치열했다.
우크라이나 전선은 광활한 개활지가 대부분이라 제1차 세계대전과 유사한 참호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양측이 영토 확보를 위해 병력과 자원을 쏟아붓는 소모전을 벌이며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한·미 당국은 북한군 약 1만 1000여명이 이미 쿠르스크에 배치됐다고 평가하는 가운데 이들이 실전에 투입되고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하면 김정은이 푸틴에게 더 큰 반대급부를 요구할 요인이 될 수 있다. 젤렌스키는 EPC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기자회견에서 이미 북한군 일부가 전투에 투입돼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조용한 북한, 다음 수 고심중
김정은은 이런 북한군의 희생을 대가로 핵추진 잠수함이나 정찰위성,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대기권 재진입 및 다탄두 기술 등 가치가 높은 군사 기술의 이전을 노릴 것으로 보인다. 미 국방부는 이날 북한군의 교전 사실은 확인하지 않으면서 “북한군이 아직 추가 파병은 안 한 것으로 알고 있다”(사브리나 싱 국방부 대변인)고 했는데, 김정은이 우선 일정 수준의 반대급부를 받아낸 뒤 추가 파병을 결정하려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에게 이는 ‘양날의 검’과 같은 위험한 도박이 될 수 있다. 사상자 발생 소식이 북한 내부에 퍼질 경우 급격하게 민심이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 또 현지에서도 대량 사상자 발생은 북한군의 동요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으로의 귀순 등 대규모 탈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동시에 김정은은 이제 푸틴과의 전략적 제휴와 트럼프와의 ‘빅 게임’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지 고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경제·군사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푸틴과 더 밀착할 수록 트럼프와의 거래는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게 김정은의 딜레마다. 북한이 8일까지도 노동신문 등 대내 매체를 통해 트럼프의 당선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이런 복잡한 심경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결국 김정은으로서는 북·러 밀착의 기회비용을 따진 뒤 대미 전략을 세우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 푸틴이 이날 발다이 토론클럽 본회의에서 북한과의 합동 군사훈련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훈련을 할 수도 있다. 왜 안 되겠는가”라고 말한 것도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그는 지난 6월 북한과 체결한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언급하며 “조약에는 상대방이 침략받으면 상호 지원한다는 4조도 있다”고 덧붙였다. 법적 효력이 있는 조약을 근거로 북한과의 밀월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듯 여지를 남긴 셈이다.
깊어지는 韓 무기지원 딜레마
정부의 대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딜레마도 당분간 심화할 전망이다. 정부는 "북한군의 관여 정도에 따라 무기 지원도 배제하지 않는다"(윤석열 대통령 7일 기자회견)는 입장이지만, 무기 지원의 ‘기준점’을 모호하게 두며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이와 관련 국방부 관계자는 8일 “북한군이 참전해서 교전이 이뤄지는 것은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되겠지만, 그것만이 무기 지원의 기준점이라고 보긴 어렵다”면서 “종합적으로 북한의 참전과 현지의 전황, 주변국과의 협력 관계를 고려해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주변국과의 협력 관계’는 트럼프 뿐 아니라 공화당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회의적 입장을 보여온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윤 대통령은 7일 기자회견에서 “무기 지원을 하면 방어 무기부터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가 의미하는 방어용 무기에는 적의 미사일·전투기 방어를 위한 방공 무기 체계 외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지뢰 살포기 등이 포함될 수 있다고 한다.
여야 '北러시아 파병 규탄' 결의안 채택 무산
8일 정치권이 논의한 북·러 파병 규탄 결의안은 여야 간 입장을 좁히지 못하며 채택이 불발됐다.
이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는 법안심사 소위원회를 열어 북한의 러시아 파병 규탄을 위한 여야 공동 결의안을 논의했다. 소위는 앞서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과 김건 의원, 더불어민주당 김영배 의원이 각각 발의한 규탄 결의안을 병합하려 했다.
그러나 결의안에 정부의 대북전단 살포 규제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 무기 지원, 국군 파병에 대한 우려를 담는 것에 대한 여야 의원들의 견해가 모아지지 않으면서 채택이 최종 무산됐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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