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싫어한 영화... 시민들 후원금이 향한 곳
[원승환]
▲ 지난 9월 2일 대전여성단체연합은 대전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전시는 영화검열과 갑질행정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
ⓒ 오마이뉴스 장재완 |
대전시는 지난 8월 30일 대전여성단체연합에 9월 5~6일 개최하는 대전여성영화제 상영작 중 <딸에 대하여>를 다른 작품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대전시가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대전여성영화제에 1350만 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기 때문이었다. '2024년 성평등주간 대전여성문화제'의 일환으로 여성주의 강좌와 여성영화제를 진행한 대전여성단체연합은 이에 반발했다.
"<딸에 대하여>는 퀴어뿐만 아니라 돌봄과 비정규직 등 다양한 여성과 관련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하물며 '여성 퀴어의 삶과 가족'이라는 주제는 여성과 뗄 수 없는 중요한 이슈다. 하지만 대전시는 단순히 '퀴어'라는 내용이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상영 철회를 요구하며 전체주의 행정으로 혐오와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아울러 대전시의 결정이 명백한 검열 행위에 해당한다며 대전시 보조금을 반납하고 9월 3일부터 7일까지 1000만 원을 목표로 긴급 모금해 영화제를 진행했다. <딸에 대하여>의 배급사 찬란도 연대하는 의미로 영화 상영료를 받지 않았고, 9월 6일 영화제에서 <딸에 대하여>는 무사히 상영될 수 있었다.
영화제 상영작을 검열한 것이 대전시만은 아니다. 인천시도 19회 인천여성영화제 상영작의 상영 취소를 요구했다. 2023년 6월 16일 인천여성영화제 조직위원회는 "인천시 담당부서가 실행계획서 승인을 앞두고 상영작을 검열하고 퀴어영화 배제를 요구했다"고 공개했다. 인천시가 상영 배제를 요구한 작품은 반박지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으로 1986년 독일의 한인여성기독교신자회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를 다뤘다.
인천여성영화제 조직위는 "인천시가 앞장서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혐오 행정을 하는 것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인천시 지원을 거부하고 우리 힘으로 영화제를 치르겠다"고 밝혔다. 인천여성영화제 조직위는 인천시 지원 없이 자체 예산으로 영화제를 개최했고 시의 검열 소식을 들은 시민들의 후원이 쏟아져 목표액을 넘겼다.
시민과 정부,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큰 관심 속에 개최되는 영화제가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사회적 문제를 낳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가 상영작을 검열하고, 상영작을 빌미로 예정된 보조금을 철회하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 10월 2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에서 펼침막을 들고 예산 삭감 문제에 항의하고 있는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과 김진유 정동진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
ⓒ 부산국제영화제 |
일부 언론과 영화인은 영화제가 지역 주민과는 상관없는 영화인만의 축제이며, 영화제 지원은 혈세 낭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지자체장의 치적 사업을 위해 만들어지는 영화제도 존재한다. 하지만 많은 영화제는 개최 지역의 필요와 요구, 그리고 한국 영화계에 미칠 긍정적인 영향 등을 검토해 필요할 때 개최한다. 지역영화제와 단편·독립영화제는 상영과 배급 기회가 부족하고 관객들이 보기 어려운 단편영화나 독립·예술영화를 유통하고 감상할 기회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독립·예술영화를 상영하고 관람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알려진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은 대다수가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 있다. 지자체 중에는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이 아예 없는 곳도 있다. 영화제가 아니면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기도, 관람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지역 문화를 활성화시켜 국가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영화제의 역할은 꽤 중요하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아래 영화제는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 지자체는 상영작을 검열하고, 배제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빌미로 보조금 지급을 철회하기도 한다. 보조금으로 영화제를 통제하는 일은 국가 단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2023년 9월, 정부의 2024년 예산안이 발표된 후 영화계는 충격에 빠졌다. 코로나로 인한 위기 상황이라 지원이 절실한데 예산은 줄었기 때문이었다. 2024년 정부 계획안의 사업 예산은 463억 원으로 2023년에 비해 265억 원 줄어들었다. 영화제 개최지원 예산도 50% 삭감되었고 영화제와 영화인 등은 반발하며 예산 삭감 복원을 요구했다.
예산 삭감에 따라 지원 영화제 숫자를 10개 내외로 줄인 것도 큰 문제였다. 2023년 지원받은 영화제는 국제영화제 15개, 국내영화제 26개 등 모두 41개였다.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전년 대비 1/4의 영화제만 지원받게 되는 것이다.
정부는 왜 영화제 지원 예산과 지원 수를 줄이려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이 문제의 해답은 과거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은 요구한 특정 영화 상영 배제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화제 지원 예산을 절반으로 삭감한 적이 있다. 바로 2014~2016년 이어진 부산국제영화제의 블랙리스트 사건이다.
▲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 |
ⓒ 문화체육관광부 |
그럼에도 영화가 상영되자 청와대는 부산영화제에 대한 전면적 지원 배제 등을 지시했다. 문체부는 국내 영화제가 문제 영화를 상영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지원 축소 혹은 배제 방안을 마련하고, 2015년 부산영화제 지원을 전면 배제할 경우 생길 파장을 고려해 전년 대비 절반 수준의 보조금 삭감 방안을 청와대에 제안해 승인을 얻은 후 영화진흥위원회에 하달했다.
영진위는 2015년 글로벌국제영화제 지원 사업에서 심사위원 선정을 조작하고, '부산영화제에 지원금이 편중되어 있고, 영화제의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를 심사위원에게 제공해 결국 부산영화제 보조금을 전년 14억 6000만 원에서 8억 원으로 삭감했다. 더불어 부산시가 지도점검과 고소 등을 진행했고 이에 따라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사퇴 등도 영화제에서 문제 영화를 상영한 것에 따른 후속 조치임이 밝혀졌다.
부산영화제 사건은 영화제 검열로서도,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실행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서도 대표적인 사례다. 문재인 정부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를 발족해 사건을 조사하고, 제도개선안을 마련하고, 관련자를 징계하고 수사 의뢰를 정부에 요구한 것은 블랙리스트가 재발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에서 블랙리스트는 다시 작동하고 있으며, 영화제 블랙리스트는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발생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팔길이 원칙을 지켜나가겠다고 했지만, 대통령의 말과 실제 정책 실행은 달랐다. 윤석열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과거 정부 같지는 않고, 진화하는 방식으로 실행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정권 입장에 반하는 영화의 상영을 막기 위해 직접 영화제에 압박을 가했다. 말을 듣지 않자 보조금을 활용해 압박하고 길들이려 했다. 보조 사업에서 지원 배제가 헌법 위반으로 인정받자, 새로 등장한 보수 정부는 다른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개별 영화제를 대상으로 한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지원 사업 자체를 가지고 블랙리스트를 실행하는 것이다.
'특정한 영화제 예산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사업 예산을 줄이고 지원 영화제 수를 더 줄이면 영화제들은 지원 받기 위해 알아서 자기 검열할 것'이라는 가정 아래 실행된 지원 정책이 새로운 블랙리스트 수법이다. 예산과 지원 영화제 수를 줄이면 정부 정책에 반하는 영화를 상영할 가능성이 있는 영화제는 돈이 없어 개최되지 못할 수도 있다. 예산과 지원 개수의 축소는 자기 검열을 통한 길들이기와 함께 영화제 폐지를 이끌 수 있다. 두 가지 효과가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 변경된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언론을 동원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만들어진 문화자유행동은 대표적인 보수 문화단체다. 이 단체의 영화분과 위원인 김병재는 <중앙일보>에 영화제 수가 너무 많아서 문제이고 경제가 어려우니 국민의 혈세를 지원받는 영화제 규모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의 글을 기고했다. 이렇게 타당성을 스스로 얻고자 했다.
이런 언론 작업은 과거 부산영화제 블랙리스트 사건에서도 동일하게 있었다. 앞서 영화제 예산 관련 언론 기고를 했던 김병재(윤석열 정부가 임명한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는 2016년에도 지역 언론과 중앙 언론에 기고하며 정부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리고 2016년에는 영진위의 국제영화제 지원 심사에 직접 참여하며 부산영화제 지원 배제에 가담하기도 했다. 똑같은 일이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었다. 심지어 출연자도 동일하다.
▲ 김동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이 5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열린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정부지원 삭감 관련 질문에 답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그런데 이 사업이 50년 만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2024년 영화제 지원 예산과 지원 개수의 축소, 2025년 서울독립영화제 예산의 폐지는 새로운 정책의 변화가 아니다. 영화를 대상으로 한 오래된 블랙리스트의 그림자가 다시 드리우는 것이다.
제도를 변경한 블랙리스트는 혐의를 찾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래서 명확하게 블랙리스트로 명명하기도 어렵다. 문체부는 사업이나 예산 변경이 블랙리스트가 아니라고 강변할 것이다. 정부의 주장대로 과거와 같은 블랙리스트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사업과 예산 변경이 특정 종류의 영화나 단체, 그리고 인물을 배제하고 검열하기 위한 것이라면 역시나 블랙리스트가 될 것이다. 반헌법적인 블랙리스트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면 일방적인 정책 추진이 아니라 민간의 의견을 듣고 정당한 의견이면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람직한 협치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원승환 인디스페이스 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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