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불운딛고 반독재투쟁
[김삼웅 기자]
▲ 1958년 5월 2일 제4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여야협상위원회를 통해 만든 민의원선거법에 의해 치러졌다. 투표소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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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망명시절부터 길러온 카이젤 수염 등 유니크한 풍채를 갖추고 언변과 토론은 쉽게 상대를 압도하는 등 한 마디로 신·언·서·판을 두루 갖추었다. 그럼에도 정치현장에서 연거푸 고배의 쓴 잔을 들어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선거가 반드시 최상의 인물을 뽑는 것은 아니다. 훨씬 유능한 인재가 하급수에게 밀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보통선거제의 모순이고 한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 할퀴고 싸운 6.25의 포화가 휩쓸고 간 1950년대 중반 유림은 독립노농당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약체화된 당세를 만회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58년 5월 2일의 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대구2구에서 입후보한 유림은 겨우 1천4백27표를 얻었을 뿐이었다(당선자인 민주당후보 이병하는 1만5천6백21표 획득). (주석 1)
그는 반이승만 노선이어서 자유당 정권의 핍박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선거는 부정·관권선거로 치닫고 있어서 민심이 정확히 투표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1958년 5월 2일 실시된 총선은 부정으로 얼룩졌다.
5.2선거는 그때까지 치른 선거 중 가장 혼탁한 선거였습니다. 공직자들이 대거 동원되고, 폭력이 난무했어요. 경찰이 노골적으로 개입한 것이지요. 미움받던 사람들이 산림법 위반으로 구속되기 일쑤였고, 야당 참관인이 여러 곳에서 구타당했습니다. 일부 지방에서는 3인조·9인조로 팀을 만들어 집단투표를 하게 했어요.
개표도 별의별 부정이 다 동원되었습니다. 개표 도중 전기를 끄고 개표하는 '올빼미 개표'가 많았고, 여당표 다발 중간에 야당표나 무효표를 끼워넣는 '샌드위치표'도 있었고, 야당 참관인한테 수면제를 먹여놓고 임의 개표한 '닭죽 개표'라는 것도 있었다고 해요. (주석 2)
유림은 선거에서 거듭 실패하면서도 독립노농당의 잔여 세력을 이끌며 꾸준히 시국에 대처했다. 민심의 이반현상과 역사의 법칙으로 보아 이승만 정권이 불원간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 예측할 것이다.
정국은 1960년 3.15 제5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이에 앞서 이승만 세력에 의해 민주당 출신 부통령 장면이 피격 당하고 혁신계의 주요 후보 조봉암을 사법살인하는 등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폭거가 도처에서 거침없이 자행되었다.
유림은 1960년 2월 6일 당의 의견을 모아 <정·부통령 선거에 관한 성명>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독립노농당은 단기 4293년 3월 15일 실시되는 제4차 대통령, 제5차 부통령 선거에 관하야 전당상임대표회 제17차 회의에서 하와 여히 결정하였음을 성명한다.
결 정
-. 독립노농당은 금차 정부통령 선거의 결정적 승리를 확보함에 장애가 불소함으로 입후보를 보류한다.
-. 독립노농당의 당원은 등록된 정부통령후보자 중에서
(1) 공인된 애국자로서
(2) 자주·민주·통일을 포함한 국가의 완전 독립과 독립노농당이 추구하는 국민생활의 합리한 개선을 조속 성취함에 신뢰성이 가장 많은 후보자를 지지한다.
단기 4293년 3월 6일
독립노농당 전당상임대표회 의장 유림. (주석 3)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위해 대대적인 관권부정선거를 획책했다. 거듭된 실정과 장기 1인 독재로 공정한 선거로는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취한 조처였다. 그는 이미 80이 넘은 고령이었지만 여전히 변치 않은 것은 끝없는 권력욕망이었다.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사망했기에 자유당은 재집권이 보장된 상태였는데도 함량이 크게 부족한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고자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관권 동원도 모자라 어용단체 반공청년단을 앞세웠다.
3월 15일 실시된 선거는 자유당의 사전 계획대로 전면적인 부정선거로 이루어졌다. 야당 참관인들이 거의 쫓겨난 가운데 3인조, 9인조의 공개투표가 감행되고, 중앙선관위는 이승만은 유권자의 92%, 이기붕은 78%의 득표를 했다고 발표했다.
개표가 진행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수가 총유권자 수를 초과하기도 해 자유당 측은 내무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율을 이승만은 80%정도로, 이기붕은 70~75% 정도로 하향 조정케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3.15선거가 부정과 폭력으로 자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많은 국민이 분노에 떨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용기 있게 떨치고 일어선 것은 마산의 시민·학생들이었다. 3월 15일 오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8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경찰과 검찰은 시위 주도자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3월 11일, 1차시위 당시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생 김주열 군의 시체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낚시꾼에 의해 떠오르자, 시민들은 다시 궐기에 나섰다.
제2차 봉기는 마침내 4.19혁명의 뇌관이 되었다. 이승만은 마산시위가 "공산당 사주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특별성명까지 발표했다.
주석
1> <단주 유림 자료집>, 133쪽.
2> 서중석, 앞의 책, 105쪽.
3> <단주 유림 자료집>, 13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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