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직 일당에서 '건보료' 떼 건보 손실 해결? [이게 이슈]
[나재필 기자]
▲ 5일 SBS 모닝와이드가 보도한 "'일용직, 요즘 돈 많이 번다'…건보료 부과 검토" |
ⓒ SBS |
건설일용직의 밥그릇을 좌지우지하는 게 날씨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이들에게 사계절의 변화무쌍함은 짓궂은 눈물의 예보다. 1년 열두 달 중 일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최근 일용근로직에게도 건강보험료를 부과하겠다는 소식이 적잖이 아픈 이유다. 마치 가렴주구(苛斂誅求,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는 것) 같은 얘기다.
정부가 일용근로소득에도 건보료를 걷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일용직은 취약계층으로 간주해 건보료를 걷지 않았지만 이젠 건보 재정에 기여할 만큼 소득이 높아졌다는 판단에서다. 일용직 근로자란 특정 고용주에게 3개월 미만의 근로(건설일용직은 1년 미만)를 제공하면서 하루 단위 또는 시간 단위로 급여를 받는 사람들을 이른다.
도대체 일용직들이 얼마나 벌고 있기에 세금을 꺼내 든 걸까. 국세청 통계를 보면 1인당 연간 일용 근로 소득은 2021년 865만 원에서 지난해 984만 원으로 상승했다. 지난해 전체 일용직 705만 6110명이 벌어들인 소득은 69조 4595억 원가량이다. 수치만 보면 큰돈을 버는 것 같지만 월 80만 원 조금 넘는 액수다.
정부가 날삯(날품팔이)에게도 세금을 내게 만들겠다는 복안은 외국인 근로자의 보험료 면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지난해 일용근로 외국인 45만 8680명은 한국에서 10조 원가량 벌었지만 건보료를 내지 않고 있다.
이유가 어찌 됐던 일용직 고혈 짜기는 묘수가 아니라 꼼수에 가까운 듯하다. 정부는 의료 공백과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등으로 발생한 건보 손실을 저소득층이 많은 일용직 근로자를 통해 해결하려는 모양새다. 건보 재정은 의료 개혁에 10조 원 규모,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시범 사업 등에도 투자될 예정이다.
문제는 정부가 최근 2년 동안 건보료율을 올리지 않고 지역 가입자 차량에 매기던 건보료를 폐지하는 등 부담을 완화하는 기조를 유지해 온 것과 배치되는 부분이다. 복지부의 향후 5년간 건보 재정 전망을 보면, 2024년 2조 6402억 원, 2025년 4633억 원의 당기수지(총지출에서 보험료 등 총수입을 뺀 수치) 흑자를 낸 뒤 2026년부턴 적자(3027억 원)로 돌아선다. 누적 적립금은 올해 30조 6379억 원에서 2028년 28조 4209억 원으로 줄어든다.
물론 이러한 전제는 올해부터 2028년까지 건보료를 연평균 1.49%(2023년 인상률) 올리고, 정부 지원은 총보험료 수입 대비 14.4%(2023년 지원율)로 유지돼야 한다.
일용직에게 건보료 걷겠다는 발상
이유 불문하고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세금을 내야 한다.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의무다. 그런데 세금 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영국의 가혹한 세금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듯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세금 좋아한 사람은 없다.
더욱이 일용직에게 세금은 반갑지 않은 혈세다. 먹고살 돈도 적은데 호주머니를 탈탈 터는 형국이니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몰린다고 생각한다. 국가정책 중 가장 치사한 짓은 '없는 사람' 밥그릇을 염탐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여유 있는 소수의 사람이 세금을 더 내는 게 마땅하다.
일각에서는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 당연히 내야 한다. 누군 내고 누군 안내는 불평등을 고쳐야 한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이에 더해 '요즘 일용직은 고액 월봉(月俸)자다. 고액 연봉자는 놀면서 돈 버는 줄 아느냐. 모든 돈에는 피땀이 있다'면서 각을 세운다. 상황에 따라 맞는 말일 수도, 틀린 말일 수도 있겠다. 다만, 일용직이란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통섭의 오류다.
일용직 근로자에게도 건보료를 내게 만들겠다는 발상은 만인평등 정신인가. 아니면 일종의 돌려막기인 셈인가. 아파도 병원조차 갈 수 없는 취약계층들. 하루 3만 원꼴을 벌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소시민들. 저임금으로 이국땅에서 한국인들이 꺼리는 일을 하는 외국인노동자들. 그들의 주리를 틀어 세금을 걷고, 그 돈으로 구멍 난 자금을 메워보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지난해 기준 월 5만 원도 안 되는 건강보험료를 6개월 이상 못 낸 생계형 체납자는 70만 세대가 넘었다. 6개월 이상 건보료가 체납될 경우 보험 혜택은커녕 재산이 가압류되거나 통장 거래가 중단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위기가구의 위험 징후다.
건보공단은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한 체납자에게 독촉 고지서를 보내고, 기한 내에 내지 못하면 통장 등 재산을 압류한다. 통장이 압류되면 전기, 가스, 수도, 통신요금을 이체할 수 없어 줄줄이 연체될 게 뻔하고 일용직으로 일하며 벌어들인 수입조차 인출할 수 없다. 하물며 체납자 가구원 중 희귀·난치성, 급성질환자가 있다면 건강보험 급여 제한으로 건강권이 심각하게 침해받을 수 있다.
▲ 이른 새벽 출근하는 일용직 건설노동자들. |
ⓒ 나재필 |
실학의 선구자 다산 정약용 선생은 '백성이 곤궁해지고 나라 또한 가난해지면 세금이 가혹해져 결국 민심은 이탈하고 천명(天命)이 떠나 버린다'고 했다. 정부가 밑 빠진 재정을 돌려막는 상황은 블랙코미디다. 설령 그것이 먹힌다고 해도 그 역효과는 가히 상상불허다.
국민에게 시급한 일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민생을 해결하는 일이다. 평등권도 중요하지만 생존권도 무시할 일이 아니다. 누가 정치하든 서민들은 잘 먹고 잘사는 게 가장 필요하다. 지금은 주판알 굴리면서 국민들 간보기 할 때가 아니다. 탁상에서 나오는 공론은 탁론도 아니고 여론도 아니다.
밤 9시, 달과 별이 희맑다. 이 정도 날씨면 내일은 일자리가 있을 것이다. 현장에서 고된 일을 마치면 손에 일용할 양식이 주어질 것이다. 그 돈으로 쌀도 사고, 전기세도 내고, 이자도 내고, 세금도 내고, 약값도 낼 것이다. 고달프지만 그건 주어진 윤회처럼 반복된다.
한 번쯤 일용직들에게 물어보라. "살맛 나냐?"고. 대답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다. "살맛 나서 사는 게 아니라, 사니까 살아지는 거"라고.
이제 정부에게 묻는다. "살 맛나게 해줄 수 있냐?"고. 대답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다. "살맛 나게 살려면 세금을 내라"고.
우리는 한 국가 안에서 동질의 꿈을 꾸지 못하며 산다. 지금 필요한 건 의무의 평등이 아니라 꿈의 평등이다. '벌었으면 내라'는 비상식의 상식보다는 '더 벌면 내고, 더 벌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시급하다. 그것이 국가의 의무다. 그것이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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