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의 고속철 도입 결정...최선의 선택이었다”

강갑생 2024. 11. 8. 07: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KTX 도입 과정 출간, 김세호 전 차관


김세호 전 건설교통부 차관. 중앙일보

‘1989년 3월 17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고속전철 및 신국제공항 건설계획’을 승인하고 보고서에 서명한 날이다. 이 서류에는 국무총리, 부총리, 교통부 장관은 물론 건설부 장관, 총무처 장관,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의 사인까지 모두 담겨있다.

고속철(KTX) 건설에 범정부적 동의가 이뤄지면서 본격적이고, 불가역적인 추진 동력을 얻게 된 것이다. 3년 뒤인 1992년 6월 30일엔 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경부고속철도 기공식이 열렸고, 12년 만인 2004년 4월 1일에 1단계 구간이 개통하게 된다.

이렇게 국내에 첫선을 보인 KTX는 올해로 개통 20주년을 맞았고, 누적승객 10억명도 돌파했다. 얼핏 일사천리로 진행된 듯싶지만 KTX 도입을 검토하고 결정하는 과정에는 건설 기간 못지않게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과정을 소상하게, 제대로 정리한 자료나 기록이 없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곤 했다. 마침내 이 같은 갈증을 풀어줄 책이 지난달 말 출간됐다.

10월 말에 출간된 '한국고속철도, KTX 탄생의 여정' 표지.


1970~90년대 초반에 걸쳐 고속철 도입이 검토되고, 결정되는 20여년의 과정을 집약한
「한국고속철도, KTX 탄생의 여정」

(대림북스)이 바로 그 책이다. 저자는 김세호(71) 전 건설교통부 차관이다.

김 전 차관은 1989년 고속철 건설방침이 확정될 때 담당 사무관으로 대통령 보고와 결재문서를 직접 기안하고 작성했다. 또 2004년 KTX 개통 당시에는 철도청장으로 개통 준비를 진두지휘했다.

민간기업에서 근무하다 늦깎이로 공직(행시 24회)에 입문해 교통부 수송조정과장과 건교부 신공항건설기획단장·수송정책실장 등을 거쳐 철도청장과 건교부 차관을 역임했다. 김 전 차관에게 책을 출간한 계기와 의미 등을 물었다.

Q : 잘 알려지지 않은 KTX 도입의 정책 결정 과정을 다뤘다.
A : “올해 KTX 개통 20주년을 계기로 그 의미를 재조명하자는 취지의 몇몇 기록들이 발표되었지만 대부분 부분적, 단편적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한 것들이었다. 또 사실관계가 왜곡되거나 특정인의 영웅 스토리로 과장된 부분들도 많아서 아쉬웠다. 특히 1970년대 고속철 논의의 초창기부터 1992년 착공 때까지의 과정은 전체적인 흐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 공백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객관적인 기록들을 근거로 그 과정을 꼭 바로 잡고 정리하고 싶었다.”

노태우 대통령과 총리, 주요 장관들이 서명한 '고속전철 및 신국제공항 건설계획 보고서'. [자료 김세호 전 차관]

Q : 대통령 재가 서류 등 관련 자료는 어떻게 수집했나.
A : “1991년 당시 교통부 수송조정과장을 떠나 청와대로 파견 근무를 갈 때 귀중한 자료들은 모두 당시 정부기록 보존소에 이관했고, 일부 출장보고서 사본이나 사진들만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해당 자료를 지금의 국가기록원과 대통령기록관에서 다시 찾고 정리하는 데만 거의 1년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국가기록물의 효율적인 보관과 관리를 위해 예산 및 인력 보강이 절실하다는 것도 느꼈다.”

Q : 당시 경제 여건상 KTX 도입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A : “실제로 KTX 건설에 관한 의사결정을 하는데 최대 걸림돌은 경제성과 소요재원의 조달 문제였다. 하지만 1983~84년에 국내외 전문기관이 수행한 ‘서울-부산 축 고속전철 타당성 연구’를 보면 개통 후 19년 뒤에 누적 수지흑자가 6조 7500억원으로 건설비를 충분히 회수할 수 있다는 분석이 있었다. 게다가 기존 경부 축의 도로와 철도는 이미 수용수요를 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경제의 정상적 흐름에도 지장을 줬다. 이런 점을 고려한, 충분한 타당성을 가진 합리적 결정이었다.”

Q : KTX와 인천공항 건설 모두 노태우 정부 시절에 결정됐다.
A :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노 대통령 때 정책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두 사업 모두 상당기간 시작도 못 했을 가능성이 크다. 노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야당 지도자로서 이들 사업에 모두 강하게 반대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해당 사업의 전면중단을 주장하며 당선됐기 때문에 우려가 컸지만, 다행히 합리적 판단 덕에 사업 일정과 방법만 수정된 상태로 진행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노 대통령의 결정은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

1992년 6월 30일 노태우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경부고속철도 기공식이 열렸다. 연합뉴스

Q : 책을 보면 김창근 전 교통부 장관처럼 숨은 주역이 많다.
A : “역사의 흐름에서 중요한 계기를 만든 이들이 간혹 잊히기도 하는데 김창근 장관 역시 그런 경우라고 생각한다. 재임기간이 1988년 12월부터 1990년 3월로 1년 4개월 남짓인 데다 이임 후 곧바로 별세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의 역할은 사실상 묻혀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야말로 이런 과단성 있으면서도 유연한 사고와 리더십을 가진 인물들을 재조명하고 배울 때라고 생각한다.”

Q : 김 전 장관 외 KTX 도입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을 꼽자면.
A : “KTX 도입이 결정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교통부의 핵심과제로 끌고 간 강동석 당시 기획관리실장과 1990년 6월부터 3년 가까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어려웠던 모든 과정을 소리 없이 조율하며 강한 추진력을 보여주었던 장상현 차관은 꼭 기억돼야 한다. 또 KTX 착공에 이르기까지 실무를 끌고 갔던 최훈 수송정책실장, 김 장관의 부임 전부터 KTX 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추진 의지를 불태웠던 한지연 수송정책국장과 성기수 수송조정과장 등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김창근 전 교통부 장관이 1989년 유럽을 방문해 고속철의 조종석을 둘러보고 있다. 오른쪽이 김세호 당시 사무관. [사진 김세호 전 차관]

Q : KTX 개통 20주년을 맞아 지금 꼭 살펴봐야 할 사항은.
A : “철도구조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철도의 건설과 운영 조직을 국가철도공단과 코레일로 나누고, 또 고속철도를 코레일과 SRT(수서고속철도)로 분리했다. GTX(수도권광역급행철도)도 노선별로 각각 민자사업자를 두고 있다. 이제는 한 번쯤 정책의 목적과 실태를 재점검하고 방향을 새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현 체제가 어떤 지표로 개혁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모두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안전이나 경제성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철도지하화, 신공항 등 정책 담당자가 꼭 유념해야 할 점은.
A :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법에 정해진 기본과 원칙에 충실하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지역 여론이란 미명을 앞세워 무분별하게 정치적 논리로만 추진되는 사업은 없어져야 한다. 요즘 추진되는 상당수 철도와 공항 사업들이 제대로 검증되고 추진되는지 심히 의심스럽고 걱정된다. 담당 공무원만의 책임이 아니다. 오늘날 정책 결정의 중심이 대통령실과 국회로 넘어가 있는 현실에서 누가 더 신중하고 현명하게 판단해야 할지를 국민 모두 엄중히 따져야 할 때다.”

Q : 인천공항 건설의 정책 결정 과정도 소개할 계획은.
A : “꼭 해보고 싶은 과제이긴 하지만 KTX보다는 관여한 부분이 적기 때문에 당시 깊이 참여했던 분들과 상의해서 결정하려고 한다. 또 여건이 더 허락한다면 직접 체험한 KTX와 인천공항의 개통 및 개항 직전 1년 6개월 정도의 긴박하고 숨 가빴던 시기에 관한 기록도 다시 한번 정리해보고 싶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긴박한 의사결정을 해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생생한 교훈들이 많기 때문이다. 시간과 건강이 허락할지가 변수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