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원의 마음상담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왜 계속 생각하는가?

2024. 11. 8.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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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자기 비난의 지독한 습관으로 하루를 보내고, 그렇게 한 주, 한 달, 그리고 한 계절이 어떻게 오가는 줄 모르고 우두커니 자기 그림자만 들여다보는 시간이 있습니다. 우울과 불안으로 마비되어 원치도 않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머릿속은 근거 없는 부정적인 생각들로 들어찹니다. ‘인지 왜곡’입니다.

사소한 일에도 최악의 결과로 치달을 것이라 예측하는 ‘파국화’, 모두 자기 탓이라 생각하는 ‘개인화’, 하나의 부정적인 사건에도, 나는 모든 일이 이런 식이라 말하는 ‘과잉일반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지레짐작하는 ‘독심술’, 따지고 보면 28% 망하거나 63% 망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그 중간지대를 보지 않고 완전히 망했다 이야기하는 ‘흑백논리’…. 이 밖에도 갖가지의 인지 왜곡들이 내가 취약해져 있는 시기를 틈타 순서표를 뽑아 번갈아 나를 찾아옵니다. 날이 선 생각과 말의 습관들이 나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늘 민폐를 끼치며,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 지금 100% 망했고, 앞으로도 모든 일에 망할 사람.

「 자기 비난의 습관에 갇히지 말고
부정적 생각의 사실 여부 따져야
실패로 인한 위축 당연시 말고
자신감 갖고 나의 시간 기다리길

일러스트=김회룡

이때 유능한 심리치료자처럼, 스스로에게 해야 하는 두 가지 질문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사실인가요?’ 당신은 정말 모두에게 민폐였나요. 누구에게도 다정하지 않았나요. 당신의 실수와 실패는 이제 당신 역사와 인생의 모든 것을 규정하나요. 모든 일이 정말 당신 탓이며 100% 실패했나요. 끈질기게 물어봐야 합니다. 그렇게 당신은 몰아치는 생각으로부터 뒤로 물러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과 말을 사실인 듯 대접하지 마세요. 어떤 말들은 이제 그만 힘을 잃어도 됩니다. 틀린 말들에 자꾸 힘을 실어주고 호응해 주지 마세요.

더욱이 그 모든 일의 근원이 나라고 믿고, 다른 사람의 마음과 나의 미래까지 멋대로 예측하려는 것은, 어쩌면 자의식 과잉입니다. 우리가 그 정도 능력은 안 됩니다. 저의 경우에도, 뭔가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크게 좌절하려 하다가도 생각합니다. ‘어휴… 하마터면 내가 늘 인정받아야 하고 누구보다 유능해야 하고 늘 가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뻔했네.’ 나는 그 정도의 위인이 아닙니다. 자의식의 크기를 줄이면 나의 왜곡된 생각들은 머쓱해져 제 갈 길을 떠납니다. 나 역시 다시 적당히 작아진 자의식과 적당히 작아진 우울과 불안을 측은하게 어루만지며 내 살길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때론 분명한 근거가 있어 무력감과 절망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이나 생각이 사실인가요?’라는 질문에 ‘단연코 사실입니다’라 답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재난이나 불의의 사고, 질병, 어떤 결함, 그 자체가 실재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 질문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계속해서 믿고 지내는 것은, 어떤 도움이 되나요? 그 생각에 어떤 기능이 있나요.’

실제 너무나 큰 실수나 실패로, 앞으로가 막막한 낭떠러지 길,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라 느껴질 때, 이런 생각들을 믿는 것이 내가 지금 당장 하루를 살아가는 데 대체 어떤 역할을 해 주나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왜 그렇게나 붙잡고 있나요. 나의 시야를 좁히고 새로운 시도를 어렵게 만들고 나를 위축되게 하는 생각과 기억들입니다. 이제 그 손님들은 당신의 뒤에 남겨두고, 그만 앞으로 나아가세요. 냉혹하고 현실적인 평가와 예측들이 다 맞다고 쳐도, 실은 내가 내 존엄성을 지키고 책임 있게 내 인생을 사는 데 있어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그 손님들은 그냥 거기 있으라 하세요.

그러니 생각이 우리를 괴롭힐 때, 두 가지 질문으로 도전하세요. 첫째, 사실인가. 둘째, 사실이라면 그 생각에 묶여 있는 것이 대체 어떤 도움이 되는가. 그리고 나선 기세, 바로 기세의 문제입니다. 같은 부정적 경험을 했다고 쳐도, 누군가는 대역죄로 노비가 된 듯 살고, 누군가는 폐위되었지만 언젠가 제자리를 되찾을 왕족처럼 귀하게 삽니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턱을 치켜들고, 내가 바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그 태도와 기세를 가지고 지낼 일입니다. 나의 환경을 정돈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고, 엉켜 있는 흐름의 큰 줄기를 바꾸고, 이제 나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끝내 원하는 자리에 가지 못할 수도 있겠으나 내가 살아온 시간은 여지없이 왕족의 시간입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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