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결성 '취지서'

김삼웅 2024. 11. 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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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 23] 반독재투쟁의 전위가 되었다

[김삼웅 기자]

 1951. 9. 유엔군의 통제 아래 피란민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 NARA
유림은 부산에서 벌어진 정치파동을 현지에서 지켜보면서 울분과 개탄을 금하기 어려웠다. 전방에서는 국군과 중공군(중국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승만은 전방부대를 빼돌려 계엄군으로 동원하고, 각종 테러단을 급조하여 민의를 조작하면서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출발한 지 5년여 만에 파쇼화가 시작되었다. 유림은 이를 분쇄하고자 여러 방안을 찾았다. 자신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원외정당인 독립노농당은 힘이 없었다. 장고 끝에 야당 각파와 무소속 의원, 재야인사, 민족주의계열 그리고 아나키스트까지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결성하자는 〈취지서〉를 작성, 공표했다.

반응은 뜨겁게 나타났다. 그의 뜻한 바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은 결성되지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호헌동지회'가 결성되었다. 반독재투쟁의 전위가 되었다. 〈취지서〉이다.

취지서

봉건적 전제정치가 자본가계급의 전제정치로 대체되는 한편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색다른 독재정치가 횡행하고, 이 양자가 다 같이 전체주의적 권력구조를 가지고 국민대중을 조종하고 있다. 이들의 전제권력 정치가 제 아무리 교묘하게 위장된 뷰러크라시를 구사하여 인민을 조종한다고 하더라도, 인민의 자각은 마침내 그 허울을 벗기고 인민자신의 자유를 되찾고야 말 것이다.

역사의 현단계는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투쟁하는 해방의 세기이고, 상호부조의 생활을 건설하는 개혁의 국면이다. 자유와 평등과 상호부조를 기조로 하는 민주주의만이 현대의 모든 모순을 해결하고 영원한 평화와 무궁한 번영을 약속한다.

민주주의는 유구한 세월을 통하여 항상 인간의 이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강요되는 희생으로 말미암아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해왔지만, 인류의 자각과 과학적 정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야 비로소 뿌리 깊고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역사의 유일한 필연적 노선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생활의 가장 완전무결한 이상임으로 해서, 그것의 실현에는 막대한 노력과 장구한 시간이 요구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냉엄한 사실이다. 역사에는 언제나 자유로운 발전을 견제하는 타성이 수반하는 것이므로, 민주주의는 선물로서 선사되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장애물에 대하여 부단히 항쟁하는 데서 비로소 쟁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금의 세계정세를 살펴볼 때, 2차세계대전의 포연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지마다 세력권의 확보와 확장에 광분하는 양대세력이 동서로 대치하여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실정으로 말하면, 현대문명에 뒤진데다가 국제정세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비민주적 요소가 이땅에 범람하여 그 종류와 수량을 일일이 열거할 겨를이 없을 정도이다. 반민족적 비민주적 공신당세력의 제거만으로도 미치지 못할 것이요. 봉건잔재의 청소만으로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다. 부귀의 추구에 혈안이 된 탐관오리, 권문세가에 아부하는 정치걸식군, 시대착오적 학문을 위장 판매하는 이용학자 등등……그 어느 하나가 민주의 적이 아니리오마는, 이것들 보다 더욱 큰 민주의 적은 민주에 대한 민중의 몰이해와 실망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땅에 아직도 어리고 약한 민주는 민주란 이름아래 범하여진 과오가 얼마나 컸던가! 무엇보다도 우리가 경각심을 가지고 경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민의'를 가장한 독재출현의 위험이라 하겠다. 구사일생의 민주체험에서 견디다 못한 나머지 민중은 현상을 타파하고자 알지도 믿지도 못할 어떤 다른 국면을 막연히 희구하게 된다.

이 땅에 〈파쇼〉가 싹틀 요소와 성장할 조건이 잠재한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보면, 무솔리니나 히틀러를 내심으로 흠모하는 자 없다고 누가 단언할 것이며, 순진한 민중의 약점을 교모하게 이용하여 영화를 독차지할 천재적 기만정치가 날뛰지 않으리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으랴.

민주는 폭력이 아니므로 세력의 우세가 반드시 민주의 보증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짐이 곧 국가'라는 망언도 그 지지자가 있고서야 말하여지는 것이고, 폭군도 그에게 따르는 도당이 있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집정관이었고, 원세개는 중화민국의 초대총통이었으나 취임 서약서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국민의 추대로 왕관을 쓰게 되었다. 세리(勢利)에 빨라 염치가 파멸된 무리의 '다수'는 민주의 반역이 될 뿐이고, 그 중에서도 앞잡이로서 충성을 다하자는 민중의 무자비한 단죄로 업보를 받는 법이다. 소수 중의 소수일지라도 민주원칙을 실천하는 자만이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굽어 보아도 떳떳이 민주주의자로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백성만이 나라의 근본' 민유방본(民唯邦本)이 되는 정치는 양생장사(養生葬死, 산자를 알뜰히 기르고 죽은 자를 깍듯이 장사지냄)에 유감이 없음에서 비롯하거늘, 마구간에 살찐 말은 있으되 들판에 굶어 죽은 시체가 뒹굴고 백성은 오히려 굶주려 있어도 배부른양 인정의치(仁政義治, 인자하고 정의로운 정치)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강압이 닥쳐올 때, 민주주의를 운운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잠꼬대일 것이다.

이 땅에서 아직 여리고 약한 민주주의를 길러내는 일은 가시밭 속에서 난초를 재배하는 어려움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깊은 강에서 엷은 얼음을 밟는 듯한 우리의 심정을 한갓 기우라고 판정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의 무사려한 관찰을 연민할 것이다.(중략)

본 연맹은 일정한 정책의 구체적 조항을 실현코자 하는 정당이 아니라 각자 특수한 정치신조를 가진 각 계통의 민주주의자들이 일치하여 행동할 수 있는 당면의 과도기적 합동전선이므로 공통한 강령만을 채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특수한 민주집단들의 독자적 작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공동방위에서 각자의 발전은 오히려 조장될 것이다. 한국의 모든 민주주의자들이 조국의 안전을 위하여 한 깃발 아래 모이기를 여기에 호소하는 바이다.

한국의 자주 민주 통일 만세!
인류평화 만세!
세계 민주주의 승리 만세! (주석 1)

주석
1> <단주 유림자료집>, 122~12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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