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흉상 재배치? 육사의 역사인식 이대로 괜찮은가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이종찬 광복회장과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박홍근 의원이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에서 열린 육군사관학교 내 독립영웅 흉상 재배치 계획 백지화 촉구 독립운동단체연합 공동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
ⓒ 연합뉴스 |
지난해 하반기에 홍범도 흉상을 학교 밖으로 내보내려다가 국민적 지탄을 받은 육사는 지금은 이 흉상을 교내 충무관 앞에서 교내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교육시설인 충무관은 화랑연병장 앞에 있다. 연병장 건너편에는 생도들의 생활 시설인 화랑관이 있다. 그래서 기존의 흉상 위치는 생도들이 자주 접할 수 있는 곳이다.
광복회 등은 그런 장소에서 흉상을 치우는 조치는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보도에 따르면 6일 기자회견에서는 "육사 생도들로부터 독립영웅들을 분리하려는 반헌법적이고 매국적 시도", "우리 군 정통성을 무력화하기 위한 친일 뉴라이트의 흉계"라는 등의 비판이 터져 나왔다.
군사영어학교가 육사의 모체가 아닌 이유
육사는 임시정부 군대인 한국광복군의 정통성을 인정한다. 지난 7월 홈페이지에 업로드된 <24-25 육군사관학교 요람>은 "광복 이후 한국광복군은 창군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은 그 정통성을 계승할 수 있었다"라고 기술한다.
육사 요람은 이 단락에서 독립군 사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임시육군무관학교·밀산무관학교·대전자무관학교·사관연성소를 거론한다. 또 한국 독립군 양성을 도운 중국 군관학교를 언급하고,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을 언급한다. 육사 요람은 이런 교육기관들을 열거한 뒤 거기서 양성된 광복군이 미·영과 연합전선을 펼친 사실을 거론하면서 "대한민국 국군은 그 정통성을 계승할 수 있었다"라고 기술한다.
그런데 그 직후에 모순되는 말을 한다. "근대적 장교 양성기관의 명맥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창군을 위한 노력으로 계승되었다"라며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가 개교하였으며, 이를 모체로 1946년 5월 1일 국방경비대사관학교가 설립되었다"라고 기술한다. 그런 다음, 국방경비대사관학교가 조선경비대사관학교로 개칭되고 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됐다고 설명한다.
미군정청 기관인 군사영어학교는 군사 간부 양성에도 목적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통역관 양성이 주목적이었다. 1945년 12월 28일 자 <동아일보> 기사 '군사영어학교 설립'은 "군정청 국방국에서는 식크 대장 통솔 하에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하고 영어를 수업식히기로 되엇다"라며 "이들 학생은 국방군 직원 1백 22명과 경무국 직원 12명 도합 1백 34명으로 미구(未久)에 국방군 교수의 통역을 마터보게 된다 한다"라고 보도했다.
육사요람은 군사영어학교를 자신의 모체로 내세운 뒤, 육사가 단기 과정에서 4년제 정규 과정으로 탈바꿈한 일을 설명하면서 "미 육사(웨스트포인트)를 정규 사관학교 설립의 모델로 삼아 재개교를 추진"했다고 말한다. 사실상 '미군정 군사영어학교는 육사의 모체다', '미국 육사는 육사의 모델이다'라고 규정한 것이다.
군사영어학교는 개교 5개월이 조금 못 되는 1946년 4월 30일까지 운영됐다. 그런 뒤 다음 날인 5월 1일 국방경비대사관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육사가 군사영어학교를 계승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국방경비대사관학교-조선경비대사관학교-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 사이의 연속성은 존재해도, 군사영어학교와 국방경비대사관학교 사이의 연속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방경비대사관학교 제1기는 조선경비대사관학교 제1기로 인정되고 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 제1기로 인정된다. 반면, 군사영어학교 제1기는 국방경비대사관학교 제1기로 인정되지 않는다. 또 4년제를 다닌 육사 11기 이하들은 단기 과정 출신이라는 이유로 1~10기와 거리를 두면서도 이들을 선배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을 선배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육사가 군사영어학교를 자신의 모체로 인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많이 따른다.
독립군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도 독립군 사관학교가 아닌 미군정 군사영어학교를 육사의 모체로 인정하는 모순적인 모습은 육사 요람뿐 아니라 육사 교장의 공식 발언에서도 나타난다. 지난 17일 육군본부에 대한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형균 육사 교장은 "육사는 화랑도로부터 시작해서 고려의 상무정신, 조선 의병, 독립군, 광복군, 6·25전쟁을 통해 조국수호에 전사하신 선열들의 공을 이어받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육사의 시초를 묻는 허영 의원의 질문에는 "군사영어학교"라고 답했다.
미군정은 독립군과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했다. 그런 미군정이 만든 곳이 군사영어학교다. 그래서 독립군의 정통성과 군사영어학교의 정통성을 함께 인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쪽을 인정하면 다른 쪽은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군사영어학교를 모체로 인정하는 육사의 태도는 독립군의 정통성을 인정한다는 외형적 표명의 순수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런 의심은 육사의 개교기념일이 5월 1일인 것 때문에도 오랫동안 제기됐다. 2018년에 <군사연구> 제146집에 게재된 육사 교수 박일송·김민식의 공동논문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효시에 대한 연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현재 육군은 창설일을 별도로 기념하고 있지 않지만, 육군사관학교는 1946년 5월 1일 국방경비대사관학교가 개교된 날을 기념하여 매년 5월 1일을 개교기념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마치 이것이 육사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매년 5월이 되면 육사는 친일분자들을 옹호하는 집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위 논문은 "육군이 조선경비대를 모체로 발족되었는데, 조선경비대가 미군정기에 미군 주도로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으로 설립하였다는 육군의 정통성에 대한 비판을 받으면서 육사도 같은 논리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라고 덧붙인다. 5월 1일을 개교기념일로 기념하는 육사의 방침은 친일파들이 다수 섞인 미군정기 군대에 자신의 정통성을 두는 태도와 관련된다는 이유로 비판이 제기됐다는 설명이다.
▲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정문. |
ⓒ 권우성 |
108명 중에는 일본군 장교 출신뿐 아니라 학병이나 지원병 형식으로 끌려간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로 구성된 군사영어학교를 대한민국 육사의 모체로 인정하는 것은 납득되기 힘들다. 두 학교가 각각 별개로 설립돼 연속성이 없는 점을 고려하면, 육사가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의 학교를 자신의 모체로 굳이 인정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당시에도 있었다. 위 논문은 "광복군은 그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군정당국이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을 대거 기용하는 데 대한 실망과 함께 군사영어학교 불참의 길을 택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이런 사례 역시, 광복군을 추앙하는 것과 군사영어학교를 모체로 인정하는 것이 양립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일제 강제징병으로 끌려갔다가 귀환한 식민지배 피해자들이 해방 직후에 조직한 군사기구가 상비군 1만 5000명과 예비군 6만 명으로 구성된 국군준비대다. 이들은 강제징병 피해자들로 구성됐기 때문에 군사영어학교의 문제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위 논문은 이들도 군사영어학교를 거부했다고 알려준다.
육사 건립에서 미군정이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육사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미군정 군사영어학교를 육사의 모체로 인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신흥무관학교나 임시육군무관학교 같은 독립군 사관학교를 놔두고, 미군정 학교를 자신의 모체로 규정하는 육사의 역사인식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런 역사인식은 역대 헌법이 추구하는 3·1운동 이념에도 어긋난다. 3·1운동을 숭상하는 나라의 사관학교라면 이 이념을 따른 독립군들의 사관학교에서 자신의 모체를 찾고 모델을 설정해야 마땅하다.
육사가 홍범도 흉상을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데서 치우려 하는 것은 자신의 모체와 모델을 독립군이 아닌 다른 데서 찾는 태도와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육사가 반헌법적인 아메리칸 드림을 탈피하지 않는다면,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의 비판은 물론이고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항시 노출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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