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누워서 본 영상... 나는 도망쳤다

그린피스 신민주 캠페이너 2024. 11. 7.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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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위한 플랜 A] 중독으로 도피해야 하는 세상은 선의를 만들 수 없다

"우리에게는 Planet B(제2의 지구)가 없기에, Plan B(플랜 B)또한 없다." 기후위기와 관련된 유명한 표어 중 하나입니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끊임없이 성장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떤 플랜 A를 선택해야 할까요? 유일하고 유한한 지구를 함께 살아가는 행성으로 만들기 위한 지구를 위한 플랜 A를 제안합니다. <기자말>

[그린피스 신민주 캠페이너]

 자료사진
ⓒ Unsplash
한 때의 나는 엘리베이터보다 늦게 퇴근하는 직원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일을 많이 했던 시기의 일이다. 그때는 정말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일과 삶의 균형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엘리베이터의 마지막 업무는 밤 10시에 건물 경비원을 우리 사무실 문 앞까지 올려보내는 것이었고, 경비원의 업무는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직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경비원이 온 후에야 나는 업무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꽤 자주 불 꺼진 계단에서 더듬더듬 벽을 짚어가며 퇴근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가 1시간만 더 늦게 퇴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엘리베이터가 1시간 더 늦게 퇴근했다면 나도 1시간 더 늦게 퇴근했을 게 뻔하다.

퇴근한 후에는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봤다. 늦은 밤에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은 그런 것들뿐이었다. 주로 주인공이 세계관 내 최강자로 등장하는 양산형 먼치킨(강력한 캐릭터를 의미)물 애니메이션 요약본을 보았다. 딱히 그 장르에 애정이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력이 없어서 다른 영상은 볼 수가 없었다.

양산형 먼치킨물에는 대부분 별다른 갈등 상황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보기 좋았다. 지금은 그때 본 수백 편의 애니메이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별 의미 없는 콘텐츠들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는 일을 설명하는 말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도파민 중독'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쉬는 시간마다 먼치킨물만 보던 과거의 나도 '도파민 중독'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도파민은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좋은 호르몬이지만, 그 뒤에 '중독'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원래의 의미에서 조금 멀어진다. 중독은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과 같아질 수 없는 탓이다.

하트를 누를수록 사랑에서 멀어졌다

나는 하나같이 똑같은 플롯으로 제작된 양산형 애니메이션을 사랑해서 시청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것들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나는 불안한 미래, 육체적 피로, 스트레스, 기력 없음 따위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하지도 않는 것으로 도망치는 일은 행복을 약속해 주지 않았다.

영상 속으로 도망칠수록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것에서 멀어졌다. 친구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게시물 속 우울한 신호를 무시하게 되었고, 소설책을 읽을 수 없었고, 요리를 해 먹을 수도 없었다. 지쳐서 나도 남도 돌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돌보지 않은 채, 나는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 더 많은 영상을 찾게 되었다.

10분짜리 영상이 대세였던 시기가 천천히 지나가고, 이제 1분 내외의 짧은 영상이 득세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SNS 새로고침을 누르고, 멍하게 짧은 영상들을 시청하고, 좀 더 긴 영상은 2배속으로 보게 되었다. 더 자극적인 영상은 돈이 되어서 차고 넘칠 만큼 많아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플랫폼들은 많은 것을 구독 요금제로 전환하여 소비자 이탈을 막고, 해외 직구 사이트들은 품질이 나쁘지만 아주 싼 제품에 대한 광고를 늘어놓는다. 외롭거나 괴로운 현실을 보상받기 위해 사람들은 물건을 산다. 무엇을 사거나, 무엇을 보는 일만이 괴로운 현실에서 도망치는 유일한 방법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일만으로도 SNS에서 하트 버튼을 누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이 사치가 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사랑이 사치가 된 세상에서 더 좋은 세상과 삶을 꿈꾸는 것은 지쳐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사람에게 마라톤에 나가라고 말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되었다.

더 먼 미래를 상상하기 위한 시간을 벌자

지금의 경제는 시간 대비 효율을 최대한으로 끌어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인생의 다양한 고통까지도 빠르게 해결해야 할 몫을 떠안게 되었다. 도파민 중독을 부추기는 영역이 하나의 상품 시장으로 편입되고, 가성비 좋게 인생의 고통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아주 흔해졌다.

반면에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고통을 해결하는 일, 혹은 슬기롭게 완화하는 일은 비싼 것이 되었다. 좀 더 쉬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 아픔을 나누는 일, 좀 더 건강한 것들로 여가를 채우는 일은 모두 비싸졌다. 그건 대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 때문이다.

시간은 모두에게 24시간, 똑같은 양만큼 지급되기에 돈보다 평등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우리는 매우 불평등하게 여가를 부여받는다. 월급이 작고 귀여울수록, 과로가 당연한 직장에 다닐수록, 직장과 집 사이 거리가 멀수록, 나 빼고 온 가족이 육아나 집안일에 나 몰라라 할수록, 내 삶을 지탱하는 것조차 힘겨워질수록 여가시간은 급격히 쪼그라든다. 그 쪼그라든 여가시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쪼그라든 취미밖에 없다. 누워서 양산형 애니메이션 요약본만 주야장천 보는 것같이 말이다.

사랑이 사치가 된 세상에서는 먼 미래를 보기가 어렵다. 지금의 고통을 내 곁의 사람들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없을 때, 고통 후 구축해야 할 미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나는 세상이 모두 '리셋'되었으면 좋겠고, 모든 정치인이 썩었으며, 희망은 없다고 외치며 울분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볼 때 슬픈 마음이 된다. 세상과 내 일상을 증오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권리는 어느새 아주 납작해져 버렸다.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도 시간이다. 흔히 기후위기를 이야기할 때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이미 다 망해버렸으며, 해도 안 될 것이라는 좌절감은 얼마 남지 않은 미래를 위한 시간마저 급격히 단축한다. 좌절감은 아주 쉽게 복잡한 문제에서 도망치는 것을 부추긴다. 더 많은 사람이 도망칠수록 더 빠르게 지구는 망가져 갈 것이다.

지구도 나도 좀 더 쉴 권리가 필요하다
 2022년, 글로벌 해양 조약을 촉구하며 그린피스가 진행한 드론쇼
ⓒ Greenpeace / Sungwoo Lee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고 있더라도, 인간의 선의로 그것을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만이 지구를 구할 수 있다.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라는 점, 지금까지의 선택이 틀렸더라도 끝내 옳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점을 믿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에도 힘이 필요하다. 지구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방법은 나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인간의 선의를 믿을 마음의 힘은 더 많은 시간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일에서 멀어지고 중독으로 도피해야 하는 세상은 선의를 만들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좀 더 쉴 권리가 있다. 이왕이면 보다 멋지게 쉰다면 더 좋다. 지구와 나를 위해 조금 덜 과로하고,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는 법을 고민할 때이다. 새로운 방식의 삶을 익힌다면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지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더 가치 있는 여가가 모두의 권리라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보장할 것을 사회에 함께 요구하자. 사랑이 사치가 되어버린 세상은 이제 끝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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