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컬처 아이] ‘니콜라 부리오의 판소리’는 옳지 않다

손영옥 2024. 11. 7.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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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0주년을 맞은 제15회 광주비엔날레 감독으로 프랑스의 미술이론가 겸 전시기획자 니콜라 부리오(59)가 지난해 5월 선정됐을 때 좀 설렜다.

한 달여 뒤 광주비엔날레 전시 제목으로 '판소리-모두의 울림'을 제안했을 때 "역시 부리오!"라며 무릎을 쳤다.

이후 광주비엔날레재단에서 나오는 보도자료 제목은 '공간(판) 안에 생동하는 모든 존재들의 울림'으로 바뀌는 등 판소리가 슬쩍 빠지거나 은유가 강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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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0주년을 맞은 제15회 광주비엔날레 감독으로 프랑스의 미술이론가 겸 전시기획자 니콜라 부리오(59)가 지난해 5월 선정됐을 때 좀 설렜다. 부리오가 ‘관계 미학’ 담론으로 국내 미술계에서도 인기 있었고, 관객 50만명을 동원하며 화제를 낳은 2005년 리옹비엔날레 이후 이스탄불, 타이베이 등 각국 비엔날레에서 러브콜을 받는 스타 큐레이터여서다. 그런 그가 한국에서 뭘 보여줄지 아주 궁금했다.

한 달여 뒤 광주비엔날레 전시 제목으로 ‘판소리-모두의 울림’을 제안했을 때 “역시 부리오!”라며 무릎을 쳤다. 동시에 뒤통수를 세게 맞는 기분이었다. 서구에 주눅이 들어 서구만 바라보다 한국성을 가장 상징하는 제목 ‘판소리’를 먼저 쓸 기회를 서구의 기획자에게 빼앗기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 기자간담회에서 임권택 감독의 판소리 영화 ‘서편제’를 틀어 보이기까지 했다. 비엔날레 개막 5개월여를 앞둔 올해 3월이었다. 참여 작가를 발표하는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는데, 브리핑을 듣다 보니 ‘어, 이게 아닌데…’ 싶었다.

“감독 설명을 들으니 이 전시가 한국에서 열렸기에 제목이 ‘판소리’이지 스페인에서 열렸으면 ‘플라멩코’였을 거 같다.”(나)

“맞다. 판소리는 공간(판)과 소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이 전시의 메타포(은유)다.”(부리오)

이날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감독 측은 ‘21세기 모든 존재의 울림-변화하는 환경과 생태의 판소리’라는 제목과 함께 판소리 역사까지 언급했다. 하지만 판소리는 플라멩코로 대체가능한 용어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후 광주비엔날레재단에서 나오는 보도자료 제목은 ‘공간(판) 안에 생동하는 모든 존재들의 울림’으로 바뀌는 등 판소리가 슬쩍 빠지거나 은유가 강조됐다.

제목 하나를 두고 웬 트집이냐 싶을 수 있겠다. 하지만 제목은 전시의 시작이자 감독의 태도이며 철학을 보여주는 지표 아닌가. 그래서 묻고 싶어졌다. ‘메타포’는 전가의 보도가 될 수 있을까. 부리오는 판소리의 소리를 ‘소리(sound)’로 썼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판소리의 소리는 ‘노래(song)’다. 요즘 화제가 되는 여성국극 드라마 ‘정년이’가 끊임없이 환기한다.

“소리(노래)는 내 바닥이고 하늘이여, 내 전부란 말이여!”

노래를 뜻하는 판소리의 소리를 공장 소음이나 물소리처럼 광범위한 소리(sound)의 하위 범주로 취급할 때 그것은 좋은 메타포가 아니다. 메타포 즉 은유는 숨겨서 비유하는 수사법이다. 판소리여도 좋고, 플라멩코여도 상관없다면 그건 맹물 같은 메타포다. 또 ‘판(공간)+소리’의 결합으로 퉁 치는 것은 언어유희,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서 다루는 인류세(인류가 지구 생태계에 끼친 영향)는 이제 비엔날레에서 흔하디흔한 주제가 됐다. 그래서 부리오는 소리와 공간의 관계 탐구라는 형식의 새로움을 통해 주제의 진부함을 상쇄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더 새로움을 주는 요소로 한국 냄새가 물씬 나는 ‘판소리’라는 제목을 장식처럼 얹은 게 아니었을까.

더 당혹스러운 건 ‘메타포’라는 단어의 칼끝에서 제국주의적 시선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아시아·아프리카의 문화는 서구인의 시선에 의해 맥락과 상관없이 읽혀졌다. 우리 판소리에 대한 충분한 연구 없이 한국에서 하니 판소리라는 제목을 들고나온 건 서구인이 갖는 우월적 시선의 산물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그는 한국에서야 어떻게 쓰이든 판소리를 자기 식으로 전유함으로써 유럽에서 해도, 중동에서도 해도 상관없는 무대를 만들었다. 전시는 세련됐지만 힘찬 새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옳은 메타포가 아니어서일 것이다. 그러니 부리오의 ‘판소리’는 옳지 않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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