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비 400원이 부담? 경비실 에어컨 설치 못한 진짜 이유
[김화빈 기자]
▲ 지난 10월 29일 오전 9시께 방문한 서울 금천구 소재 아파트 경비초소. 한 아파트 경비원이 1평 남짓한 초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 초소는 1982년 아파트 준공 후 한 번도 정비가 이뤄지지 않아 폭염과 한파에 취약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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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땀이 삐질삐질 나게 덥고 겨울에는 온몸이 시릴 정도로 추워요. 선풍기랑 히터만으로 버티기 힘들죠."
'관리비 400원 상승 부담'은 핑계였다. 전·현직 아파트 입주자 대표 회장 간의 갈등으로 아파트 경비초소 냉난방기 설치가 무산되는 일이 벌어졌다.
관할 구청이 냉난방기 설치 비용 일부를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입주자 대표들은 현장에 취재를 갔던 기자 앞에서 1시간 동안 서로를 탓하며 설치 부결 책임을 돌렸다.
지난 10월 29일 오전 9시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위치한 아파트(986세대)를 방문했다. 1평 남짓한 경비초소는 1982년 아파트 준공 후 제대로 정비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올해 여름 초소 내부 온도는 37도까지 치솟았지만, 경비 노동자들은 선풍기 1대로 12시간 2교대 근무를 버텼다. 올겨울은 난로 1대로 지내야 한다.
해당 아파트 입주자대표 28기(현직) 회장으로 냉난방기 설치를 추진하고 있는 A씨는 "견적을 본 냉난방기 모델의 최대 소비전력은 0.9kW로 한여름과 한겨울에만 가동하면 전기료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며 "구청의 지원을 받으면, 일부 설치 금액(약 200만 원)을 제외하고 986세대가 월 400원 정도 부담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지난 9월 20일 찬성 3표, 반대 4표로 경비실 초소 11곳의 에어컨 설치를 부결했다. 부결 사유는"구청이 사업비를 지원해 주기로 했지만, 전기료 상승이 우려되기 때문"이라고 적시됐다.
▲ 지난 10월 29일 오전 9시께 방문한 서울 금천구 소재 아파트 경비초소. 1982년 준공 후 1평 남짓한 초소는 한 번도 정비가 이뤄지지 않아 폭염과 한파에 취약한 상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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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공동주택관리법은 '입주자, 입주자대표회의 및 관리주체 등이 경비원 등 근로자에게 적정한 보수를 지급하고, 처우개선과 인권존중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할 뿐이다(제65조의 2). 금천구청도 '공동주택 관리 노동자 근무시설 설치·개선 사업'을 시행하고, 사업비의 50%를 지원하고 있지만, 입주자대표회의가 사업을 신청하지 않으면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2023년 8월부터 '50인 미만 포함 모든 사업장에 휴게시설 설치를 의무화한' 산업안전보건법이 시행됐다. 이에 따라 해당 아파트도 단지 가장자리에 에어컨이 있는 휴게실을 설치했다. 하지만 경비초소와 거리가 멀고 경비원들이 초소를 비우기 어려워 무용지물이나 다름 없다. 기자가 이를 지적하자 일부 입주자대표회의 동대표와 소장은 "여름에는 시원한 지하실로 가서 쉬면 된다"고 말했다.
관리소장은 "아파트 동대표들이 의결만 하면 에어컨 설치는 1평이든 반 평이든 설치할 수 있는 문제"라면서도 "동대표들끼리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입주자대표회의 내부 갈등을 언급했다.
입주민 선의에 기대야 하는 휴게권
해당 아파트 26·27기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자 동대표인 B씨는 "올해 동대표들이 모여 안건을 부결했으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설득해서 일을 풀어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혼자 회장이라고 동대표들 (입장이) 다 있는데 따로 (행동)하면 화합이 되겠나"라고 말했다. 냉난방기 설치를 반대하는 또 다른 동대표들도 "아파트는 공동체"라고 동조했다.
'냉난방기 설치가 회장 독단'이라는 지적에 현재 회장인 A씨는 "냉난방기 설치 기사님께 견적도 받고, 의논하자고 제안도 했지만, (동대표들이) 응하지 않았다"며 "사이가 서로 안 좋다고 이 문제를 언제까지 내버려둬야 하나"라고 반박했다.
전문가들은 '강제력 없는 법이 경비 노동자들의 휴게권을 입주민 선의에 기대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은성 노무사(샛별 노무사사무소)는 "법이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범자(규율 대상자)에게는 강제력이 있어야 하고, 수혜자에게는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하 노무사는 "현행 공동주택관리법은 강제성이 없고, 휴게시설 설치·운영 기준을 다룬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도 현장과 괴리된 측면이 있다"면서 "그런데도 고용노동부는 제도안착을 위한 노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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