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급여 계속 타먹는다고 욕먹는 사람들의 정체
[이동철 기자]
▲ 서울 마포구 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 실업급여 신청 창구에 붙은 부정수급 방지 안내문 |
ⓒ 연합뉴스 |
가뜩이나 일손이 모자란 회사에 피해를 끼치지 말자는 착한 생각에 양씨는 미련 없이 회사의 권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실업 인정을 받기 위해 방문한 고용센터에서는 양씨가 실업 인정 대상이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회사가 퇴사 처리 과정에서 고용보험 상실 신고 사유를 '자발적 이직'으로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회사가 양씨에게 사직을 권고해 이를 받아들였는데 이직 사유를 자발적 이직으로 처리하다니 배신감에 양씨는 사업주에게 전화해 따졌습니다. 사업주는 고용노동부로부터 고용지원금을 받고 있어서 권고사직과 같은 인위적인 고용조정을 하면 지원금이 중단되어 불가피하게 그렇게 처리했다고 이해해 달라고 했습니다. 일하다 다쳐서 회사에서 나가게 된 것도 억울한데 실업급여도 못 받게 되어 양씨는 퇴사에 따른 경제적 위기를 고스란히 스스로 감당해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처럼 노동 현장에서는 사업주의 해고나 권고사직, 계약만료로 노동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비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사례가 많습니다. 이때 고용보험법에 따라 실직한 노동자들에게 실업급여라 불리는 구직급여를 지급합니다. 이직(퇴사) 전 180일 동안 고용보험에 가입해야 하고 퇴사 사유가 비자발적 이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양씨의 사례에서처럼 노동자가 사업주의 요구로 사직하여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음에도 사업주가 이직 사유를 거짓으로 신고해 노동자의 실업급여 수급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용보험법상 노동자가 회사를 그만두면 사업주가 고용보험 상실 신고를 하게 됩니다. 이직확인서라 서류에 퇴사 사유를 기재하는데 이직 사유를 회사의 권고가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 그만뒀다고 기재하는 겁니다.
보통 300인 미만의 중소기업에서는 권고사직이나 해고를 통해 노동자를 내보내면 정부로부터 고용지원금의 지급 중단이나 이주노동자 채용에 불이익을 받습니다. 따라서 사업주들은 노동자를 내보내면서 사직서를 받아두고 자발적 이직이라 허위로 신고합니다.
양씨의 경우 사장님이 사직 사유를 빈칸으로 둔 사직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대부분 노동자는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퇴직금 지급 등 퇴사 처리가 늦어지기에 사측에서 요구하는 대로 사직서에 서명해 줍니다.
실업급여 받으려고 노동자가 떼를 쓴다고?
이처럼 고용보험법상 실업급여를 받기 위한 행정절차에서 관계의 우위는 사업주에게 있습니다. 노동자의 실업 인정을 판단하기 위한 이직확인서를 작성하고 신고하는 주체가 1차적으로 사업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직확인서의 이직 사유가 허위로 기재 된 경우 노동자는 고용보험 상실 신고 사유를 정정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만 사업주가 신고한 이직 사유가 허위라는 점을 증명해야 합니다.
앞서 양씨는 사업주가 권고사직임에도 고용지원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인 일이라고 기재했다는 전화 통화 내용을 녹취했습니다. 이를 증거로 양씨의 이직 사유가 권고사직이라는 점을 고용센터 실업 인정 담당자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일손이 부족한 중소기업에 실업급여를 노리고 잠깐 일하고 그만두면서 권고사직으로 처리해 달라고 떼쓰는 노동자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보도한 사례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례가 일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일반화하는 것은 실업급여 행정 처리 과정의 권력관계를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독자 여러분도 일터에서 원하지 않는 퇴사 위기에 놓였다면 절대 '개인 사유에 의한 사직서'는 작성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용자가 '퇴사 절차가 늦어진다'라며 눈치 주고 압박해도 무시하면 됩니다. <근로기준법> 제36조에 따라 사직서 작성 여부와 무관하게 사용자는 퇴사 후 14일 이내에 퇴직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문자메시지나 메일 등으로 "회사의 사직 권고, 일방적인 퇴사 통보 등에 따라 불가피하게 사직합니다"라는 취지의 사직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시고 화면 등을 갈무리해 두시면 사업주가 허위로 자발적 이직이라 고용보험 상실 신고를 하는 때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 영등포구에서 정부의 일자리 사업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사회단체에서 일하는 정아무개 씨는 매년 3월부터 12월 중순까지 사업 기간을 정해 기간제로 일합니다. 9개월 남짓 근무하다 그해 사업이 종료되면 다음 해 3월 사업 재개 시점까지 실업급여를 받아 생활을 꾸립니다. 매년 1월부터 2월 말까지 실업급여 대기기간 14일을 제외하면 2달이 채 안 되는 기간 실업급여를 받습니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정부가 재정을 출자하는 공공기관 등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구직과 상담 서비스 등을 민간 위탁하여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청년 노동자들이 수만 명이 넘습니다. 비용을 아낀답시고 퇴직금도 나오지 않게 정부가 설계한 일자리에서 그래도 경력을 쌓겠다고 일하는 청년 노동자들에게 실업급여는 가뭄의 단비와 같습니다.
비단 공공부문만이 아닌 민간 사업장에서도 청년 구직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최저임금에 1년 미만의 단기간 일자리가 많습니다. 정부가 운영하는 일자리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약 11만 4000건의 구인 광고 중 약 19%에 해당하는 2만 1400건은 1년 미만의 단기간 일자리였고, 이중 약 26%는 3개월 미만이었다고 합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청년층 고용 노동통계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15세에서 29세 사이 청년의 일자리 중 약 40%는 비정규직이고 이들의 평균 근속기간은 약 11개월이었습니다. 사업 기간이 끝나면 다음 직장을 찾을 때까지 이들에게는 실업급여가 생계유지의 수단입니다.
▲ 민주노총 청년노동자들이 지난 5월 27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실업급여 삭감 법안’규탄한다! 청년·취약계층 노동자의 고용안정부터 보장하라! 민주노총 청년노동자 긴급 기자회견을 연 모습. |
ⓒ 이정민 |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실업급여 수급기간이 3년인 덴마크, 2년인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실업급여 총액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실제 실업급여를 받는 기간도 길지 않습니다. 김종진 일하는 시민연구소 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체 구직노동자의 실업급여 수급기간은 평균 3.9개월입니다. 5인 미만 사업장은 3.8개월에 불과하며 29세 미만 청년은 3.1개월에 그칩니다. 실업급여를 3회 이상 반복 수급한 사람 중 29세 이하 청년 구직자는 6%에 불과합니다.
실업급여 반복 수급에서 60세 이상 고령 노동자의 비중이 35% 이상으로 높은데 이들이 실업급여를 반복 수급하는 이유는 이들이 몸담은 일자리가 고용이 불안하며, 저임금의 질 낮은 일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고용노동부 장관님이 직접 고령 노동자 구직활동 지원기관에 한번 가 보시기 바랍니다. 구직자의 경력과 의사를 고려하지 않은 채 구직자를 비어 있는 일자리에 끼워 넣으며 실적 올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자주 목격할 것입니다. 정부가 취업률 올리기에 급급할수록 실업급여 반복 수급의 악순환은 계속될 겁니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실업급여 수급자의 현실을 다시 들여다보고 구직자가 질 낮은 일자리를 벗어나 자신만의 경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구직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데 집중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또한 구직기간 동안 생계를 튼튼하게 지원할 수 있는 제도로 실업급여를 재설계해야 합니다. 사용자가 고용관계의 우위에서 실직 노동자의 이직 사유를 허위로 신고하는 경우 이는 실업급여 수급권을 훼손하는 행위인 만큼 강력한 처벌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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