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들판에서 목격한 제주마의 슬픈 죽음 [제주 사름이 사는 법]

황의봉 2024. 11. 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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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사진작가' 김수오 사진전 <가닿음으로>

[황의봉 기자]

"깊은 밤 홀로 중산간 들판을 거닐며 만나는 황홀한 풍경들. 별빛과 달빛 아래 펼쳐진 어둠 속 풍경은 더없이 평화롭고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제주 들판에는 제주마들이 자리한다.

들판에서 태어나 비바람과 눈보라를 온몸으로 견디다 들판에서 생을 마감하는 제주마의 삶은 어린 시절 보았던 제주 사람들의 삶을 떠올린다. 내 사진 속 제주마는 척박한 제주섬에서 강인하게 삶을 일궈온 제주 민초들을 상징한다.

내게 곁을 내준 제주마들을 수년째 지켜보며 담은 사진에는 사계절과 생로병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미젖을 먹으며 한창 뛰어놀던 어린 망아지가 하룻밤 새 앓다가 죽어서 까마귀와 들개를 거쳐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과, 한겨울 눈 속에 파묻혀 생을 다한 늙은 말의 모습은 우리의 삶과 다를 바 없다."(김수오 작가 노트)
▲ 작가와 말의 교감 김수오 작가는 “몇년 째 만나온 제주마들이 나를 자신들의 공동체 구성원으로 받아주었다”고 말한다.
ⓒ 김수오
수년째 한밤중에 한라산 기슭 드넓은 들판에 나가 제주마의 삶을 내밀하게 카메라에 담아 온 김수오 작가의 사진전 '가닿음으로'(제주 돌문화공원 내 갤러리 누보에서 11월 30일까지)가 첫날부터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1월 2일 오후 열린 사진전 오프닝 행사장을 꽉 메운 참석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깊은 감동에 빠져들었다. 김수오 작가 특유의 '한밤중 사진'이 자아내는 서정성 짙은 아름다운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가가 말에게 '가닿음으로' 시작된 말과의 일체감이 관객들에게도 그대로 와닿았기 때문이다. 말과의 오랜 시간 깊은 교감을 통해 포착한 생명의 탄생과 소멸, 그 사이에 놓인 삶의 애잔함이 우리 인간의 그것과 너무도 닮았다.

작가와 오랜 교분을 쌓아온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말들과 사귄 지 여러 해 되었다. 사진작가로서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을 위해 거기에 새벽에도 가고, 저녁에, 밤에도 간다. 밤의 어둠 속에서도 달빛과 별빛을 끌어모아 촬영한다. 작가는 말을 기록하지 않고, 말을 그린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재현이 아닌 심미적 표현물이 되었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이 바로 그러한데, 그 작품들의 또 다른 미덕은 생왕쇠멸(生旺衰滅)이라는 자연순환의 절실한 내러티브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주마의 생로병사를 담다

김수오 작가는 지난 5년여 동안 제주 중산간 드넓은 들판에서 살아가는 수십 마리의 말과 함께하면서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 가운데 가려 뽑은 35장의 사진은 제주마가 세상에 태어나고, 자라고, 병들어 죽기도 하고 어미가 되고, 다시 대지의 흙으로 돌아가는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관람객들은 갤러리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이 과정을 마치 스토리텔링처럼 감상할 수 있다.

김수오 작가는 사진전을 보러 온 관람객들에게 전시된 작품을 하나씩 풍경 감상하는 방식으로 보지 말라고 조언한다. 몇 점의 작품이 하나의 서사를 구성하고 있으므로 순서대로 연결 지어 감상하면 제주마의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일생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봄날 제주마가 새끼를 낳는다. 어미가 새끼의 태아막을 혀로 핥아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해 여름 어린 새끼가 그만 앓아눕게 되고, 들판에 쓰러진 새끼를 지키겠다는 어미의 결연한 표정이 느껴진다. 가을날, 안타깝게도 끝내 그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새끼 말은 백골의 잔해로 변했다. 새끼를 잃은 어미 말이 먼저 낳아 기르던 다른 새끼 말과 둘이서 노을로 물든 들판을 쓸쓸히 걷고 있다.
▲ 어느 제주마의 생애 봄날 막 태어난 새끼의 태아막을 혀로 핥아주는 어미 말.
ⓒ 김수오
▲ 어느 제주마의 생애 여름날, 앓아 누운 새끼를 지키겠다는 어미의 결연한 표정.
ⓒ 김수오
▲ 어느 제주마의 생애 새끼 말은 끝내 죽어 백골이 됐다.
ⓒ 김수오
▲ 어느 제주마의 생애 새끼를 잃은 어미가 먼저 낳아 기르던 다른 새끼 말과 함께 들판을 쓸쓸이 걷고 있다.
ⓒ 김수오
김 작가가 작품해설을 통해 들려주는 한 제주마 가족의 이야기다. 어미가 새끼를 낳아 함께 살아가다가 이별의 아픔을 겪는 스토리가 긴 여운을 남긴다. 또 다른 제주마의 사연도 가슴을 저리게 한다.
늦가을, 뒷다리가 마비됐는지 걸음걸이가 불편한 새끼 말이 어미 뒤를 따라가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이어간다. 그해 동짓날 눈보라가 날리는 밤, 새끼는 쓰러졌고 어미는 밤새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사흘 후 폭설이 멈춰 들판으로 찾아간 작가는 죽은 망아지 옆에 다른 늙은 말이 얼어 죽어 마치 봉분처럼 하얗게 눈 속에 파묻힌 모습을 목격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새끼를 잃은 어미 말은 눈 덮인 벌판에서 묵묵히 거닐며 눈 속에 파묻힌 풀을 찾아 뜯는다.
▲ 눈보라 속의 죽음 뒷다리가 마비됐는지 걸음걸이가 불편한 새끼 말이 힘겹게 어미 뒤를 따라간다.
ⓒ 김수오
▲ 눈보라 속의 죽음 눈 내리는 동짓날 새끼는 쓰러졌고, 어미는 밤새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 김수오
▲ 눈보라 속의 죽음 죽은 망아지 부근에 다른 늙은 말이 얼어 죽어 마치 봉분처럼 보인다.
ⓒ 김수오
▲ 눈보라 속의 죽음 새끼를 잃은 어미 말은 눈 속에 파묻힌 풀을 찾아 뜯는다.
ⓒ 김수오
김수오 작가는 평생을 자연 그대로의 들판에서 살다 가는 제주마들의 삶을 지켜보며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생명체로서의 유대감을 느낀다고 했다. 김 작가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처럼 생생하게 제주마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을까. 그가 어떻게 들판의 제주마들과 '특별한 교감'을 나눌 수 있었을까.

"제가 몇 년째 만나온 제주마들은 나를 자신들의 공동체 구성원으로 받아주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꾸준히 자기들 곁에 다가와서는 망아지도 잠들고 어미 말도 잠시 몸을 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던 그 시간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새끼를 낳는 어미 말 곁에 쪼그리고 앉아 망아지가 태어나는 순간을 지켜보았던 시간은 무척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산고의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어미 말이 갓 태어난 새끼의 태아막을 오랜 시간 혀로 핥아서 벗겨줍니다. 망아지는 태어난 지 1시간 만에 비틀거리며 일어나 어미 젖을 찾아 물더군요.

그렇게 젖 먹고 누워서 쉬고 다시 젖 먹고 비틀비틀 걸음을 내딛더니 서너 시간 뒤엔 어미 말을 따라서 씩씩하게 들판 깊숙이 사라져 갔습니다. 늦은 오후부터 한밤중까지 내내 쪼그려 앉아 지켜보느라 무릎이 펴지지 않았지만, 생명 탄생의 순간은 참으로 경이롭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갓 태어난 망아지는 태어날 때부터 거의 매일 곁에서 지켜보던 나를 친구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깜깜한 밤중에도 드넓은 들판에서 달빛과 별빛을 모으며 사진을 찍고 있으면 어느새 불쑥 내 곁에 나타나 옷소매를 물어 당깁니다. 진드기로 가려운데 긁어달라는 거죠. 그러면 저는 사진 찍다 말고 시원하게 긁어줍니다."
▲ 서리 내린 들판 풍경 늦가을 중산간 들판의 제주마. 한 그루 마른 나무 위에 까마귀 한 마리가 보인다.
ⓒ 김수오
어머니의 모습

김수오 작가는 왜 하필이면 말 사진에 몰입했을까.

"매일 밤 제주마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내가 제주마에 끌리는 까닭을 알게 됐습니다. 소도 있고 노루도 있고 까마귀도 있는데, 유독 제주마의 삶에 끌리는 까닭은 그들 모습 속에서 나의 유년의 추억과 억척스레 자식을 키우며 강인하게 살아온 내 어머니의 모습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진전 개막식에서 김수오 작가는 관객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촬영하면서 겪은 많은 에피소드를 쏟아냈다. 김 작가가 전해주는 제주마의 삶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말처럼 우리 어린 시절과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말들은 보통 봄에 태어납니다. 여름 가을을 거치면서 자라야 겨울에도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늦게 태어나면 겨울에 얼어 죽을 수 있거든요. 말도 젖 먹는 어릴 때 잘 죽습니다. 사람이 유년 시기를 잘 넘겨야 튼튼하게 성장하는 것처럼 말도 어린 시절을 잘 넘기는 게 중요합니다.

밤에 잘 때 보면 어미 말은 새끼를 누이고는 자신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서서 잠을 잡니다. 어미 말이 누워서 자는 건 완전히 평화롭다고 느낄 때입니다. 한번은 어미 말이 서 있다가 막 누웠는데 눕자마자 코를 고는 겁니다. 그 표정이 너무 고단해 보였어요. 꿈도 꾸는지 잠꼬대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곤하게 자는가 싶지만 5분이나 될까요, 다시 일어나서는 새끼 옆을 든든히 지키는 모습이 우리 어머니들의 쪽잠을 연상케 합니다."
▲ 인간과 말이 나란히 잠든 밤 한밤중 무덤가에서 평화롭게 자는 말. 밤에도 서 있는 말이 보인다.
ⓒ 김수오
김수오 작가와 말이 교감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이야기로 보고 들으면서 '비인간 존재'와의 공존이라는 화두가 떠오른다. 굳이 멸종위기종 보호나 반려동물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공존의 가치관이 확산하는 요즘이다.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에서 말이야말로 제주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온 대표적인 비인간 존재가 아닌가. 김 작가의 사진전이 단순한 사진 감상에 머물지 않고 긴 여운을 남기게 하는 까닭이다.

'밤의 사진작가', 그의 본업은...

김수오는 '달빛과 별빛을 끌어모아' 촬영하는 밤의 사진작가다. 어두운 밤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연유가 있다. 그는 본업이 한의사다. 하루 진료가 끝나고 어둠이 깔릴 무렵이 사진작가 김수오에게 허락된 시간이다.

밤의 사진작가 김수오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한밤중 홀로 들판에서 밤을 새우면 무섭지 않으냐"고. 그의 대답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누군가 뒤에서 다가와 '귀신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깜짝 놀랐네, 난 또 사람인 줄 알았네'하고 말입니다. 사람이 무섭지, 귀신은 무섭지 않거든요."

제주 태생의 김수오 작가는 누구보다도 고향 제주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도 제주를 지키는 사람들을 치료하면서였다. 오래된 마을공동체를 지키려 온몸으로 해군기지 건설을 막다가 다치고 쓰러진 마을 주민들을 진료하기 위해, 한의원을 마치면 한라산 남쪽 강정마을로 달려갔다. 그리고 진료가 끝나면 다시 한밤중에 돌아오기를 되풀이했다.
▲ 노을빛 들판을 걷다 노을이 아름답게 물든 들판에서 오름을 배경으로 제주마가 걷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 김수오
▲ 들판의 아침 풍경 해가 떠오르는 아침, 제주마의 등에 까마귀들이 내려앉으며 하루가 시작된다.
ⓒ 김수오
이렇게 사계절 숱한 날들을 오가면서 바라본 어둠 속 제주 산야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한라산 위에 별들이 반짝이고, 오름의 능선이 실루엣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 모습을 카메라로 담기 시작했다. 제주가 점점 변화하고 과도한 난개발로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가는 안타까운 상황이 그를 점점 사진작가의 길로 빠져들게 했다.

2년 전 제주의 오름 풍경을 담은 사진전 '신들의 땅'을 선보였던 김수오 작가는 중산간 들판 제주마들의 생애를 주제로 한 두 번째 개인전을 열면서 이렇게 다짐한다.

"제주다움을 간직하며 제주마의 터전이 되어주던 제주 산야가 각종 난개발로 사라져갔고 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습니다. 제주민의 삶의 터전인 수많은 공동목장이 각종 난개발로 골프장과 리조트로 사라져 버렸어요. 그대로가 아름다운 제주섬의 자연환경이 더는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카메라 가방을 메고 들판으로 나섭니다."
▲ 눈 내린 겨울날의 풍경 한겨울 눈 덮인 중산간 들판에서 제주마가 눈을 헤치며 힘겹게 생을 이어간다.
ⓒ 김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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