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스님 방해로 시위 못 하고 고문만 당해
[정만진 기자]
▲ 송인수 지사 판결문, 서울 3.1운동기념탑 |
ⓒ 국가보훈부 |
독립만세운동이 삼천리 강산을 덮고 가던 1919년 3월 당시 송인수는 경북 문경 금룡사 부설 지방학림 소속 23세 학승이었다. (서울의 중앙학림은 뒷날 동국대학교가 되고, 지방학림들은 승가대학이 되었다.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학림에서 배웠는데, 그를 학승이라 했다.)
전국 만세시위에 맞춰 문경에서도 독립운동 준비
전국 방방곡곡에서 각 지역 장날에 맞춰 만세시위가 일어났듯이 문경 사람들도 그렇게 할 계획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에 배치되어 있는 일제 경찰 또한 장날에 맞춰 시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결국 문경 지역 만세 시위는 사전 정보 파악에 성공한 일제 경찰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주도자들이 계획 단계에 사전 검속되면서 궐기는 시작되기도 전에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이런 상황에 서울에서 전장헌이 3월 25일 금룡사를 방문했다.
연고지를 찾아 시위를 독려한 중앙학림 학승들
전장헌은 금룡사 학승으로서 서울 중앙학림에 유학 중이었다. 전장헌은 신발 밑창에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송인수에게 건네면서 "중앙학림 학승들이 각자 전국의 연고지를 찾아 만세운동을 독려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거족적으로 시위를 해야 세계만방에 우리의 뜻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법"이라고 독려했다.
이튿날 전장헌은 서울로 돌아갔고, 그를 배웅한 즉시 송인수는 동료 학승 성도환과 함께 시위 준비에 돌입했다. 두 사람은 최덕찰 등 10여 명에게 "4월 13일 대하 헌병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벌이자!"라고 권유해 참여를 약속받았다. 이로써 문경 지역 만세운동 참여 학승은 18명으로 늘어났다.
10km 떨어진 우곡 장터를 향해 출발했지만
이윽고 4월 13일, 우곡 장날이었다. 오후 3시쯤 학승들은 태극기 4장을 감춘 채 10km 거리의 대하 헌병주재소를 향해 출발했다. 계곡을 따라 걸어 내려와 석문 인근에 닿았을 때 숨을 헐떡이며 추격해온 금룡사 주지 겸 지방학림 교장 혜옹 스님에게 붙잡혔다. 결국 학승들은 우곡 장터에 가지 못하고 말았다.
다음날 학승들은 모두 일제 헌병에 체포되었다. 끌려간 학승들은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시위 준비 과정 전반을 낱낱이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6월 3일 대구복심법원은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송인수에게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열반해 극락세계에 가셨으니 그후로는 편안하실 듯
그후 송인수는 승려로 살다가 독립 직후인 1947년 11월 6일 51세에 입적했다. 유골은 화장되어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묘소 정보'에는 '선골'로 기록되어 있다. 재가 된 뼛가루가 산이나 강, 바다 등에 흩뿌려져 묘소를 특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열반하였으니, 속세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채 극락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으리라. 자신이 하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 무수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음을 알지 못하리라. 반민족행위자들이 준동해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고문하고 죽이는 기이한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하리라.
서울 장충동 2가 산14-81번지에 기념탑
국가보훈부는 특별한 현충시설이 별도로 세워지지 못한 1919년 만세독립운동 참여 독립유공자들에 대해 서울 중구 장충동2가 산14-81번지 소재 '3·1독립운동 기념탑'을 소개한다. 199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 80주년을 기려 건립된 이 탑에 대한 국가보훈부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한 이래 전국 각지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이어졌다.
일제 군경은 처음부터 무력으로 탄압하였지만, 애국선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선언서에서 선언한 대로 비폭력 평화적인 시위로 온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세계 평화를 실현하려 온갖 희생을 감수하였다.
이러한 비폭력 독립운동은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으며, 국제여론의 지지와 동정을 받아 이것이 일제에게 압력으로 작용하여 조선총독을 경질하고 종래의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즉각적인 독립은 쟁취하지 못했지만,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까지 출범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독립국가를 세울 기초를 놓았다.
광복회의 3·1독립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9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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